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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4.16 01:15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61)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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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밤의 연가

“뭐야? 왜 그렇게 얼이 빠져있는 거니? 빨리 가자. 저 비밀의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음 팀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열리지 않아.” 
영미가 재촉했다. 일행들은 모두 문을 통해 이미테이션 매장으로 사라진 뒤였다. 발로 쐐기를 박고서 닫히려는 문을 제지하고 있는 점원 너머로 더벅머리의 얼굴이 보였다. 
“저 오빠 볼수록 진국일세. 먼저 가라고 했는데도 저리 목을 빼고 있는 것 좀 봐. 다리만 성했으면 좀 좋았겠어?”
턱짓으로 더벅머리를 가리키며 영미가 말했다. 둘은 비밀의 문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정아가 영미에게 몸을 기울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미치겠어, 미친개 때문에.”
“아까 전화가 그 새끼였어? 왜? 마담언니가 다 해결되었다고 했잖아.”
“물론 그랬지. 근데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야.”
영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정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 회장님께 내가 유부녀이고 애까지 있다고 폭로하겠대.”
“뭐, 저런 양아치 같은 새끼 보게! 돈을 다 갚았는데 대체 그러는 이유가 뭐야. 혹시 그러면서 따로 돈을 요구했니?”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야. 혹시 ...너를?”
“그러는 것 같아. 저번에 자고 있을 때 가슴을 더듬기도 했거든.”
“정말? 그걸 가만 뒀어? 급소를 걷어 차버리지.” 
흥분한 영미가 발로 앞차기를 해보였다.  
“아무튼 그 문제는 이따 얘기하자. 설사 강 회장이 안다 해도 자르기야 하겠니? 마담언니 입장이 곤란해지기는 하겠지만.”
영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정아는 더벅머리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곧 문이 닫혔다. 
이미테이션 매장은 정품 매장보다 훨씬 활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시중의 명품 매장이나 공항 면세점에서 볼 수 있는 고가의 제품들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표를 달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터틀넥은 물을 만난 고기였다. 밖에서 낯선 여자를 안고 온 남자라면 반성의 의미로 아내에게 이런 선물 하나쯤 들고 가는 게 예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매장을 누비는 그를 백희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영미도 싱글벙글 좋아했다. 배불뚝이가 아까와는 다르게 상품에 바짝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정아 곁으로 돌아온 영미가 우두커니 서 있는 더벅머리를 보고는 정아에게 눈치를 주었다. 정아가 마지못해서 한마디 했다. 
“아까 형님 말 못 들으셨어요? 오빠도 집에 계신 사모님께 드릴 선물 하나쯤은 준비해야지요.”
정아의 소곤거림에 더벅머리가 빙그레 웃었다. 영미가 더벅머리의 팔을 잡아 매장 쪽으로 이끌었다. 그가 가볍게 팔을 빼며 대꾸했다.  
“내겐 그림의 떡이지. 사가도 줄 사람이 없으니.” 정아는 아차 싶었다. 
“아직 미혼이세요? 아님 돌아온 싱글?”
영미가 물었다. 그는 싱겁게 웃기만 할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여자 친구는 있을 것 아니에요,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 있으면 여기서 선물을 사가서 고백해 보세요. 이미테이션이지만 초 에이급이라서 정품과 다를 바 없어요. 혹시 퇴짜를 맞아도 덜 아까운 금액이니 좀 좋아요?”
영미의 부추김에도 더벅머리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미가 다시 권하려고 하자 정아가 영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영미가 갑자기 왼편 구석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어머, 저기 좀 봐.”
정아는 고개를 돌렸다. 반짝거리는 시계로 가득 찬 진열장 앞에서 연신 팔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옆에서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 건 백희였다. 
“저 진열장에 있는 시계들은 홍콩에서 들여온 에이급 중에서도 에이급이야. 그냥 정품이라고 보면 돼. 그래서 가격이 장안 아닌데, 만약 터틀넥이 저걸 구입한다면 백희 저년은 진짜 오늘 대박을 치는 거지.” 
영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백희를 바라보던 정아는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순간 더벅머리가 정아의 왼팔을 당겨 손목을 살폈다. 
“왜요? 우리 정아 시계 사주시게요?”
영미가 반색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아는 자신의 구두를 가리키며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영미가 정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오빠는 진짜 멋진 분! 어서 가셔서 예쁜 걸로 하나 골라주세요. 그럼 오늘 머리를 올리는 제 친구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최고의 선물이 될 거예요.”
더벅머리가 정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정아가 괜찮다며 손을 뺐다.
“왜, 이미테이션이라서?” 더벅머리가 정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미안해서 그렇지요. 마음만 받을 게요.”
가볍게 목례를 하는 정아를 영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쇼핑이 끝났다. 비밀 매장에서 상품을 고르지 않은 이는 더벅머리가 유일했다. 앞선 매장에서 쇼핑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배불뚝이도 클러치 백 하나와 보스턴백을 구입할 정도로 다들 쇼핑에 열중했다. 덕분에 아가씨들의 표정이 너나없이 밝았다. 오히려 대박을 기대했던 백희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한 듯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퇴장에 앞서 점원이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여러 말을 했으나 요점은 구입한 물건들을 이따 저녁에 객실로 개별 전달해드린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장 마담이 상표법 위반으로 구속될 때, 바로 저 출구 밖에서 합동단속반이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는 쇼핑한 물건들을 손님들이 직접 가지고 나가게 했거든. 그날 손님들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은 아주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물이 되었지. 그 후로는 지금처럼 홀가분하게 맨몸으로 나가게 해.” 
영미의 설명에 정아가 아하, 하고 맞장구를 쳤다. 
매장을 나선 일행들은 골목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로바다야끼 야화’로 가 간단한 안주에 술을 한 잔 더 할 것인지 아니면 바로 아래 지하의 ‘불놀이 단란주점’으로 가 음주가무를 즐길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영미의 배불뚝이와 다른 한 팀만이 야화로 가기를 원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터틀넥이 주도하는 단란주점을 원했다. 정아는 더벅머리에게 어디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영미가 더벅머리에게 야화로 가자는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더벅머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바로 호텔로 가야겠어!”
뜻밖의 선언에 터틀넥이 당황했다. 터틀넥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손을 내저었다. 더벅머리가 애원조로 다시 말했다. 피곤해서 호텔로 가서 쉬어야겠다고. 한참을 설득하던 터틀넥도 더벅머리가 완강하게 버티자 더는 권하지 못했다.   
“우리 아우가 급하긴 급했네. 그래, 어서 가서 쉬어. 피곤해도 할 일은 신나게 해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터틀넥이 앞으로 주먹을 뻗자 더벅머리도 주먹을 내밀어 부딪쳤다. 
호텔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려고 큰길까지 따라온 영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넌지시 말했다. 
“아까 마담언니가 프런트에 가서 객실과장을 찾으라고 했잖아. 객실 업그레이드 시켜줄 거라고. 나는 그게 마음에 걸린다. 객실과장 그놈 알아서 득 될 것이 없거든. 그놈 조심해. 틈만 나면 아가씨들 따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놈이니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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