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by 유로저널 posted May 0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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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7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 받던 러시아의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Leopol'dovich Rostropovich)가 8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전세계는 이 위대한 음악가의 사망에 깊은 탄식과 애도를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는 그는 한 음악가를 넘어서 한 위대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자유와 박애를 노래하였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 사람이었다.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때 서 베를린 장벽의 한 편에서 홀로 첼로를 들고 나타나 바흐의 무반주 조곡을 연주하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또 1996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첫 내한 공연 당시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나왔을 때 무대 뒤편의 합창석을 향해 돌아 앉아 연주를 하기도 하였는데 연주회 내내 자신의 뒷모습만을 보아야 했던 합창석 관객들을 위한 그의 배려였다. 또 우리에게는 장한나양을 천재성을 발굴해 키워낸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아제르바이젠의 바쿠에서 첼리스트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설적인 첼리스트인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인 그는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공부하였고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관현악법을 셰발린으로부터는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그 후 피아니스트 리히터, 길레스, 바이올리니스트 코간, 오이스트라흐 등과의 연주로 젊은 시절부터 그의 명성은 시작되었으며 그 후 여러 국제 콩쿠르를 석권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파블로 카잘스가 있었다면 현재에는 로스트로포비치가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첼리스트로써의 그의 존재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고난은 시작된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다.

  구 소련정부로부터 인민예술가의 칭호와 함께 예술분야의 최고권위의 상인 레닌상과 스탈린상을 받은 그였지만 반 체제 작가인 솔제니친을 옹호하면서 소련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결국 1974년 미국으로 망명을 한다. 1978년 소련 정부는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지만 1990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에 의해 복권되었다. 미국을 건너간 로스트로포비치는 1977년부터 94년까지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활약하여 이 악단을 성장시켰다. 그가 이 악단에 취임 당시 그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가 이 오케스트라에 취임 당시 악단의 실력은 2류 급으로 분류되는 정도였다. 더군다나 새로 부임한 지휘자가 세계적인 첼리스트이니 당연히 첼로파트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너도나도 잔뜩 긴장하며 연주를 하자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로파트를 향해 지시했다.
“그렇게 겁먹은 강아지처럼 연주하지 말고 창문을 활짝 열고 심호흡하는 기분으로 자신감 있게 연주해 보시오!”
그 말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첼리스트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 있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스트로포비치는 말했다. “ 좋습니다. 창문이 활짝 열렸군요. 그런데 들어오는 공기는 오염되어 있군요!”

  그는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자유가 필요하거나 불의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는 음악으로 항거했고 어려운 이들의 친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1980년 2월 27일 파리 살 플레이엘에서는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으며 1991년 군부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크렘린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가담하기 위해 입국 비자도 없이 모스크바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1999년 러시아에 설립한 로스트로포비치 재단은 많은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

  또 그는 음악 앞에서 항상 겸허하였는데 그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의 녹음은 그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곡의 전곡 녹음을 1991년 그의 나이 64세가 될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세상에 내놓았는데 많은 이들은 그가 15살부터 수도 없이 연주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의 레코딩을 이처럼 늦게 한 이유를 궁금해왔었다. 87년 그는 이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한 인간이 그의 일생에 꼭 한번만 ‘완전’이라는 말을 쓴다며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흐의 작품을 말한다. 나는 아직 그의 무반주 첼로조곡 전곡을 녹음한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나의 속에서 아직 기회가 성숙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보면서 이 위대한 인간의 삶에서 음악은 너무나도 적절한 도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진정 음악의 가치와 힘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많은 음악가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실현될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양심이라는 재판관과 만나게 된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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