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할 수 있는 용기

by 유로저널 posted Apr 1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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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대한민국 남성들이 학창시절을 겪으면서 적어도 한 두 번쯤의 주먹다짐을 벌이기 마련인데, 필자의 경우는 초등학교 때 몇 번 주먹다짐을 벌인 뒤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한 번도 싸움을 한 적이 없다. 원래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초등학교 6학년 즈음부터 아버지를 따라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어설프게 운동을 했던 게 효력(?)을 나타내 턱걸이 대회도 나갈 뻔 하고, 팔씨름으로 전교 짱도 먹으면서 싸움을 하지 않아도 누가 굳이 건드리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먹다짐을 했던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봄, 학기가 막 시작된 때였다. 필자는 다른 이의 잘못인데 내 잘못으로 오해가 되어 내가 피해를 본 경우, 이를 못 참는 성미인데, 그 싸움이 바로 그로 인해 벌어진 싸움이었다. 점심시간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있었고,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몇몇 친구가 선생님이 안보이도록 배구공을 던지면서 교실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당시 그것은 선생님에 의해 금지된 것이었음) 그 공이 실수로 내게 날아왔고, 하필 그 순간에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나를 나무라신 것이다. 실제 몰래 공을 갖고 놀다가 내게 공을 날린 녀석은 아무말도 않고.

억울함과 분노가 파도와 같이 몰려오면서 당시 필자보다 키도, 덩치도 큰 그녀석에게 끝나고 학교 뒤 화장실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당시 필자는 반에서 뒤에서 다섯 번째 번호에 들 만큼 키가 제법 컸고, 그 친구는 필자 다음 다음 번호였던 것 같다. 학교 뒤에는 별도의 화장실 건물이 으슥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불량한 중학생들의 흡연 장소이자 초등학생들의 단골 대결장소(?)였다. 그런 식으로 정식 대결을 신청해서 싸움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날 오후 수업 시간 내내 그녀석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한 없이 키웠고, 이윽고 수업이 끝나고 대결 장소에서 그녀석과 마주했다. 물론, 구경하러 온 녀석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막상 대결장소에서 그녀석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멍해졌다. 수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저녀석과 꼭 싸워야 하나, 괜히 싸우자고 불러냈나, 이러다 안 싸우면 구경하는 녀석들이 나를 무시할 것 같은데, 근데 나보다 키도, 덩치도 큰 저 녀석이 혹시 엄청난 싸움꾼이면 어쩌나… 이런 다양한 생각들을 굴리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석을 먼저 치고 말았다. 이미 시작된 싸움, 그렇다면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나를 때릴 틈을 주지 말아아 한다고 느낀 나는 정말 한 대도 맞지 않고 그녀석을 때렸다. 이 정도면 내가 이긴 거라고 여겨져 주먹질을 멈추는 순간 그녀석과 눈이 마주치면서 그녀석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미운 감정은 온데간데 없고, 순간 그녀석에게 너무나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구경하는 녀석들이 있었기에 끝까지 사나운 모습을 유지했지만, 사실 내 속은 엄청난 후회와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5학년 때까지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니어서 전혀 몰랐던 그 친구와 학기 초부터 그렇게 싸움을 하는 바람에 그 친구와의 관계가 참 불편했다. 재미있는 것이, 당시 필자도 그렇게 활발한 성격이 아니었던 지라 먼저 사과를 하거나 말을 꺼내기가 너무나 어려웠고, 그 친구도 필자 못지않게 내성적이었는지, 보통 남자들끼리 주먹다짐을 하고나면 금방 화해하고 같이 뛰어노는 보편적인 사례와는 달리, 그 친구와는 결국 졸업할 때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얼굴도 서로 안마주치려 피하던, 어찌보면 반에서 키는 가장 큰 축에 속하면서 한없이 쪼잔한, 우스운 꼴로 1년을 지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게 된 그 친구는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사건이 발생했던 순간은 본인도 당황해서 내가 억울하게 혼나는 와중에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나보다. 나 역시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싸움을 걸어 흠씬 때려준 게 미안했고, 그 친구도 굳이 나와 원수진 것처럼 지내고 싶진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우리는 졸업을 하게 되었고, 필자는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중학교로 배정을 받게 되어 중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 한 켠에는 그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중학 생활을 지내던 중, 어느날 반창회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졸업반에서 별로 친구도 없었고,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오랜만에 졸업한 학교와 친구들의 모습이 궁금해서 나가게 되었다. 반창회 장소였던 학교 문을 들어서는 순간, 정말 기적처럼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그 친구를 딱 마주하게 되었다. 사는 동네도 전혀 다르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닌 그 친구를 기적처럼 다시 만날, 더 정확히는 마지막으로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걸 수 있는 기회를 하늘이 준 것 같았다. 그 친구도 나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을 더 이상은 후회스럽게 간직하고 싶지 않았던 데서 오는 용기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1년도 훨씬 지난 일을 어제 일처럼 ‘미안하다, 우리 싸운 거 잊자’고 먼저 말했고, 그 친구는 ‘언제 우리가 싸웠냐’며 사과를 받아주었다. 화해할 수 있는 용기를 처음으로 배운 순간이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그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런 저런 세상일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기도 하는 요즘, 문득 그 친구에게 비록 늦었지만, 그래도 먼저 미안하다고 화해를 청할 수 있었던 용기가 지금도 남아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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