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아, 오늘은 내가 한 잔 살게

by 유로저널 posted Mar 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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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른바 고대 자퇴녀의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지금 나는 그들이 갇혀있는 터널을 빠져나온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그 터널 어디 쯤엔가 갇혀서 그 시절 나처럼 신음하고 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리노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 터널에서 끄집어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혹여나 독자분들 중 고대 자퇴녀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한 여학생이 자퇴하면서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다. ‘88만원 세대’로 대변되는 현 시대 젊은이로서, 대학이 더 이상 대학의 역할을 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혀 끊임없이 무의미한 경주를 강요 당하는 현실에 대해 직시하고, 더 이상 거기에 삶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당당히 대학을 때려친다는 (표현이 경박했다면 죄송하다, 하지만 자퇴라는 말보다 이 표현이 어딘가 어울린다) 내용이었다.

그녀의 외침을 몇 자 옮겨본다. 그녀의 외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배들의 외침이며, 아마도 훗날 내 자식, 내 손자의 외침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그녀의 외침은 이 시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자, 어쩌면 그 동안 우리 모두가 애써 방관했던 우리 사회의 곪아터진 상처에서 솟구치는 고름이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기 한 종목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워서 인생 등급을 메기는 우리 교육과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젊은이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고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변하면서 TV에서 더 이상 청춘 드라마를 찾아볼 수 없게 된 현실이 분명 잘못된 것인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뜯어고쳐야 하는 게 수두룩히 보이는데도, 고칠 것은 고치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하는 게 정상인데도, 그럼에도 모두들 일단 자기 앞가림만 되면 장땡이니까, 그냥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왔던 것이었으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그저 못 본 척 지나치기만 했다.

어쩌면 필자를 포함한 지난 세대들은 멍청하거나,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지나치기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애들, 분명 우리보다 똑똑하고 용감하다. 다들 공감하면서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실행하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 터뜨리니 말이다.

딸의 무모한 도전에 비록 그녀의 부모님은 속상하실 지언정, 그녀가 앞으로 훨씬 험난하고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할 지언정, 누군가 이렇게 바위에 달걀을 던졌다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혹자는 이 여학생을 이렇게 비판할 지도 모른다, “누구는 그게 잘못된 것인 줄 몰라서 그러냐고, 그 와중에도 꾹 참고(?) 열심히 해서 성공(?)한 사람들 많다”고. 이게 대한민국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일단 기존에 해왔던 것이고 남들도 다 하는 것이니 잔소리 말고 무조건 성공해서 너만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장땡이라는.

다들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믿으면서 1%의 자리, 그것도 안 되면 10%의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명문대를 놓고, 대기업과 공무원을 놓고 경주한다. 나머지 90%를 패배자로 만드는 이 경주가 잘못된 것인 줄 모두 알지만, 그래도 당장에는 경주에서 1등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기 시합을 마친 이들이 부모가 되면 또 자기 자식이 1등이 되길 바라며 경주를 시킨다.

과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많은 대학생들이 이 여학생의 외침에 가슴 떨리는 공감을 하면서도 차마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는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서, 지 자식 1등한다고 자랑질하는 부모들이 큰소리 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대자보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누가 더 강한지는 중요하지 않아. 강한자가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후배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경주를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꼭 증명해주라. 어쨌든, 너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오늘은 내가 후배에게 소주 한 잔 살게.”

나도 아직 어리다면 어리고 변변치 못한 입장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정말 이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에게 한 잔 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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