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열 여덟 살의 12월

by eknews03 posted Dec 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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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능을 막 끝낸 열 여덟 살의 12, 나는 당시 큰 맘 먹고 일명 노가다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로 했다. 그 때까지는 태어나서 남한테 돈을 받고 어떤 일도 해본 적이 없었다.

 

벼룩시장을 보고서 그나마 우리 집(일산)에서 가까운 능곡에 위치한 인력 소개소 같은 곳에 전화를 했더니, 새벽 5시 반까지 소개소로 나와서 대기하라고 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내린 새벽, 당시만 해도 서울과는 확연히 다른 맑고 싸한 공기를 자랑했던 일산의 새벽은 너무나 추웠고, 나는 버스를 타고 능곡으로 향했다.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던 순진한 나는 그냥 그렇게 인력 소개소에만 가면 당연히 노가다 일을 할 기회를 주는 줄 알았고, 그 이른 새벽, 그 추운 겨울에 설마 노가다를 하려는 사람이 많을까 싶어 난생 처음 해보게 될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 반, 두려움 반으로 인력 소개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인력 소개소에서 얘기한 5시 반을 딱 맞춰서 도착했건만, 그곳의 문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소개소 사무실은 이미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아마도 그날 가장 늦게 그곳에 도착했을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넌 뭔데 고작 이제서야 나타났냐?”라고 말하듯 한심한 눈초리였다.

 

일당 5만원의 노가다를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른 시간, 또 그렇게 추운 날씨에 모여들어 일할 기회를 얻기 위해 소리 없는 총성처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세계(?)에서 나름 인정을 받는 베테랑들은 사무실 가장 앞 편에 마련된 몇 개 안 되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감을 받아서 일터로 하나 둘 자리를 떴고, 별다른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다른 이들은 그렇게 우선 순위로 선택 받아 일터로 향하는 베테랑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 가장 뒤편에서 처음 보는 그 광경에 기가 눌린 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또래 중에서는 힘 좋다고 여기고 노가다 일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여겼건만, 그 노가다 일을 할 기회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니...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부모님은 선뜻 내어주셨을 돈이었을 수도 있는 5만원, 5만원을 내 힘으로 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던가!

 

성실하신 아버지 덕분에 그 때까지 험한 꼴 한 번 안 보고 춥지 않게 살아왔던 나였는데, 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추운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 나는 한 시간 가량 멍청하게 서있다가 그곳을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감을 배정받는 이들이 줄어드는 것을 보니 그 인력 소개소로 의뢰된 일감도 거의 바닥난 것 같고, 일감이 좀 더 남았다고 해도 초짜인 나에게까지 그 일감이 돌아오기에는 여전히 사무실에 서 있는,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인력 사무소를 나오는데 어느덧 해가 뜨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 동안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너무나 편하고 안전하게 살아와서 몰랐던 세상, 이제 성인이 되고 저 세상과 부딪혀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할 텐데,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 지...

 

우리 집에서 인력 소개소가 있는 능곡까지 가려면 일산과 서울을 오고 가는 좌석버스를 이용해야 했기에, 5만원을 벌어오겠다고 호기 있게 집을 나선 나는 돈을 벌어오기는커녕 왕복 버스비로 2천 몇 백원을 쓰고 들어왔다.

 

그렇게 터덜 터덜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 그 밥상도 더 이상 평범한 밥상이 아니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따스한 밥상을 아무 조건도 없이 차려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기에.

 

한 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느 하나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 이른 시간에, 그 추운 날씨에도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사람들, 그들의 땀방울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놀고 먹는 시간에,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간에 누군가는 그렇게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의 노가다 도전기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고, 얼마 뒤에 다행히 내가 고 3 여름 무렵부터 모자를 눌러쓰고 맥주를 마시며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러 들락거리던 스카이 라운지 생맥주집에서 통기타 라이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

 

어느덧 하염 없이 흘러버린 세월, 그 열 여덟 살 소년은 어느새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되었고, 이곳 런던에서 벌써 여덟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지금 나는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내고 있지만, 지금도 그 열 여덟 살 시절 12월의 어느 날 맞닥뜨렸던 그 추웠던 새벽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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