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Samaritan

by eknews03 posted Oct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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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용 주차공간이 별도로 없고 그냥 주차가 허용된 집 앞 도로변에 주차를 하는데, 집 바로 앞에는 그렇게 주차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은 관계로 종종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그래봐야 걸어서 5분 이내)에 주차를 하곤 한다.

 

그날도 그렇게 집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주차해둔 차로 다가갔는데, 보니까 와이퍼에 작은 종이 쪽지가 하나 남겨져 있었다.

 

뭐지 하면서 읽어보니 어떤 차종과 차량번호가 적혀 있고, 이 차가 내 차를 박았으며(hit), 자신이 목격했다면서(witnessed by) 목격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차를 살펴보니 진짜로 어떤 차가 내 차를 스친 것처럼 긁혀있었다. 그렇다고 찌그러진 정도까지는 아니고, 아마 골목길을 서행하다가 발생한 접촉사고였던 것 같았다.

 

내 차는 그렇게 좋은 차도 아니고, 차에 흠집 좀 생긴 걸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스타일인 덕분에 별로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걸 굳이 범인(?)을 잡아서 손해 배상을 받거나 보험 처리를 하거나 해야 하나 싶었고, 더 솔직히는 그게 너무나 귀찮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누군가가 이렇게 쪽지를 남겨줬으니, 일단 고맙다는 연락은 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쪽지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형적인 영국 발음의 중년 아주머니 목소리였다. 그 분께 쪽지를 남겨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하면서, 그러나 실제로 어떤 조치를 취할 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되면 그 분의 이름과 번호를 제공해야 하니, 그렇게 되면 귀찮게 해드리는 셈이니 내가 너무 죄송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분은 그러더라도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사용해도 된다고 하신다.

 

어쨌든, 그냥 지나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시 한 번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했더니, 예전에 누군가도 자신에게 똑 같은 일을 해줬다고 한다.

 

다음 날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이 얘기를 꺼냈더니 “Good Samaritan이 너를 도왔구나.”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Good Samaritan’이라는 표현을 종종 접했던 것 같다.

 

‘Good Samaritan’, 성경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에서 유래된 이 표현은 곤경에 처한 타인을 돕는 사람, 혹은 공공의 안전이나 정의를 위해 적극 나서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아가서 꼭 심각한 곤경에 처한 타인을 돕는 것은 아닐 지라도, 내 차에 그 쪽지를 남겨준 분처럼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일임에도, 타인의 일에 정의롭게 나서는 사람도 ‘Good Samaritan’이라고 부른다.

 

이번 읽을 겪으면서 문득 나 자신은 과연 ‘Good Samaritan’인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지난 번에 서른 즈음에에 썼던 것처럼 현금 600파운드가 들어있는 양복 자켓을 주인에게 찾아준 일과 이번 여름에 안내견을 동반한 시각장애인이 길을 건너는 것을 도와준 게 그나마 떠올랐다.

 

보통은 안내견이 횡단보도로 안전하게 안내해야 하는데, 이 날은 개가 더위를 먹었는지 차들이 그냥 달리는 도로 중간에서 길을 건너도록 안내했고, 나는 지나가다 그 광경을 보고 얼른 도로로 뛰어들어서 차량들을 잠시 멈추고 그 시각장애인이 안전히 길을 건너도록 도왔다.

 

반면에 ‘Good Samaritan’이 되지 못하고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못본 척 했던 부끄러운 순간들도 떠올랐다.

 

한 번은 퇴근길에 골목에서 백인 청소년 두 명의 수상한 모습을 목격했다. 딱 봐도 덩치 크고 못되게 생긴 녀석이 왜소하고 겁 많은 녀석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다가가는 것을 의식했는지 덩치 큰 녀석이 잠시 괴롭힘을 멈추고 내가 지나가길 기다렸고, 나는 지나가면서 괴롭힘을 당하던 녀석의 슬픈 눈과 마주쳤다.

 

하지만, 나는 그냥 지나쳤다.

 

피곤한 퇴근길에 굳이 더 피곤한 일에 연루되기 싫었고, 더 솔직히는 영국 청소년들의 문제에 굳이 내가 관여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괴롭힘을 당하던 녀석이 한국인 청소년이었다면 내 선택은 달랐을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갈수록 팽배해져가는 현대 사회, 더구나 남의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정말 피곤한 일에 휘말리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는 만큼, 사람들은 점점 다른 이의 어려움에 무관심하려 하고, 말 그대로 몸을 사리려 한다.

 

그렇게 타인의 어려움에 대한, 정의에 대한 무관심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해지고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

 

다른 누군가를 비판할 일이 아니라 당장 나 자신이 그렇게 ‘Good Samaritan’이 되려 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참 많다.

 

반면에 이번에 내 차에 쪽지를 남겨준 분처럼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도움을 받으면 또 그렇게 남을 돕게 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Good Samaritan’이 되어 준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안전해지고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언제 또 그런 순간이 찾아올 지 모르지만, 만약 다음 번에 ‘Good Samaritan’이 될 기회가 또 찾아온다면 부디 그 때는 부끄러운 뒷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나치지 않게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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