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의 프랑스이야기

중세를 넘어서 르네쌍스로 3

by eknews posted Oct 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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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넘어서 르네쌍스로 3


지평을 넓혀준 탐험가 과학자 철학자들과 교회


1492년 컬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사건은 모든 지리적 성서적 지식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였다. 지구가 네모가 아니라 둥글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배를 타고 서쪽 바다로 멀리 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 왔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자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너 인도와 중국에 간다고 출발하였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교회가 이야기하던 금기사항 마저 깨어졌다. 


창조주가 만든 낮과 밤을, 하늘을 경외하고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해와 달과 별을 찬미하던 신실한 사람들이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아침 저녁으로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던 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태양이 정지 되어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순종하며 교과서를 외워대는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하고 혹세무민하고 풍속을 해치고 교과서 개편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가택 연금당하고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야 했다. 


성경의 여호수와 10장을 보면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므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하니 적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어 종일토록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당시의 교과서는 성경이었고 성경을 고쳐 써야 하는 비극적 시대가 시작된다. 아침이면 엄마들이 아이들을 깨울 때 동쪽에 해가 떴다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구가 돌았다 일어나라” 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과학의 시대가 왔다.


이로부터 교회가 주장하는 절대적 진리는 불변이라 하더라도 일반적 과학적 사실은 교회가 더 이상 규제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에 기초를 둔 헬레니즘과 말씀에 기초를 둔 유다이즘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며 달려 가게 되었다.  



신 구교 종교 전쟁과 시대의 인물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카톨릭 교회는 에라스무스가 제기한 일을 그도 통제 못하고 그 일에 가담한 과격분자들은 보다 본질적인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역사를 나중에 돌아 보면서 답을 미리 보아서 알지만 로마교회는 구교와 신교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조각 조각나고 갈갈이 찟기고 너덜너덜해졌다. 왜 그 다지 많은 회가 생겨나야 하고 왜 그다지 많은 종파가 종단이 생겨나야 하는지 개혁을 시작한 위대한 인물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틴루터(1483-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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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신부가 1517년 로마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적시한 비텐베르크 성당의 반박문은 베드로 성당 건축비용을 담당하기 위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적시하였다. 마틴 루터 자신도 카톨릭 신부의 신분으로 성직자이면서 우매한 백성을 우롱하는 교회와 당시 동료 성직자들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이로 촉발된 종교의 분열과 그 막심한 피해는 에라스므스의 예언처럼, 항상 그랬던 것처럼 우매하고 신실한 일반 백성 신도들이 다 감당한다. 성서의 원전에 충실하려 했던 에라스므스의 노력에 힘입어 그가 새롭게 발견한 원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그 말씀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이 로마 교회 출신 루터의 반발로 인하여 중세 천 년간 지속되었던 로마 교회의 종교적 통일성은 파괴되었다. 유럽인들은 그 동안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들이 갑자기 의문 속에 던져지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됐다. 더 이상 교회와 사제에 대한 순종이 보편적 결론을 도출하는 기초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 사제라는 중간 상인을 배제하고 하나님과 직거래를 하겠다는 발칙한 발상과 교회의 물질 숭배 사상에 대한 반격은 유럽의 종교적 바탕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대 사건이었다. 


새로운 세상은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의문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일반 신자들 사이에도 종교적 진리에 관한 생각이 일치하지 않았다. 종교나 권력의 권위에 도전이 시작되고 그 영관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시기였다.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은 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중세의 어두움에서 나와 새로운 빛의 세상으로 나오는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대단한 사건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가 금지했던 라틴어 성서를 자국어로 일부 번역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성서를 무기로 일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들이 득시글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 곳에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제국의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로스 5세의 시대에는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523년 루터는 “예수는 유대인”이라는 논문으로 유대인을 회유, 신교도들의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히브리어 연구와 구약 연구가 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의 교류를 확대 시킨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후 1543년 유대교도들의 개종이 없자 루터는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논문을 내고 반 유대주의자가 된다. 한 시대의 혁명가의 한 민족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인하여 후일 히틀러는 선량한 독일 대중을 선동하여 유태인을 홀로코스트의 제단에 불사른다. 


카를로스 5세 당시로 돌아가 로마의 상황을 살펴보면 클레멘스 교황(1523-34년 재위) 당시 1527년 로마 인구 5만5천명의 절반이상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의 황실 군대에게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과격한 카톨릭들과 루터 신봉자들의 만행은 적그리스도를 무찔러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명감으로 뭉쳤다.


카톨릭 교회는 내부적으로 확실한 개혁을 해야만 했다. 루터의 개혁의 물결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교황 파울루스3세(1534-1549년 재위)는 1542년 예수회를 승인한다. 2013년에 이르러 500년이 흐른 후 예수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교황을 내놓게 된다. 외부적으로는 일반 대중을 무릎 꿇게할 수 있도록 가능한 화려하고 장엄한 교회 건축과 예술에 투자한다. 



장 깔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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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인물은 프랑스 느와용 출생의 장 깔벵(1509-1564)이다. 보쉬에는 말하기를 “장 깔벵은 종교 개혁의 두 번 째 제사장”이라고 물렀다. 하지만 깔벵은 살아 생전에 루터를 만나 본적이 없다. 루터의 개혁안이 독일의 선거후와 귀족들과 농민들에게 받아 들여졌다면 깔벵의 개혁에 대한 생각은 일반 민중이나 상공업자들에게 널리 받아 들여 진다. 어떤 면에서는 루터보다 능력 있는 개혁가로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변화시켰으며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깔벵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출판하여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알렸다. 


1530년대에 이르면 깔벵의 신교 교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늘어나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독일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깔벵이다. 깔벵의 지지자들과 힘을 모아 1550년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미 1534년에는 영국의 왕 헨리 8세(1491-1547)가 자신의 이혼과 재혼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벗어나 영국 성공회를 만들어 영국의 국교로 독립하게 된다.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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