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 예술칼럼

삶의 기쁨에서의 절정과 아름다움의 서비스를 모두 함께 전달해 주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1

by eknews posted Dec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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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에서의 절정과 아름다움의 서비스를
모두 함께 전달해 주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1




서양 미술사에서 인기 있는 주제로 여러 화가들의 그림 속 주인공된 여인이 있다. 구약성서 유딧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목을 벤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유디트다.


유디트는 오랜 세월동안 그림 속에서 거의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자랑스러운 영웅이나 사악한 요부의 모습이었다. 이런 유디트를 에로틱한 여인으로 그린 화가가 있었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 - 1918)다. 그의 유디트는 황홀한 표정으로 적장의 목을 들고 웃고 있는 가장 관능적인 여인이다. 관능미와 에로티시즘은 클림트 그림의 핵심이다.
 


32- 유디트.jpg

 

좌 - '천국의 문'의 유디트(로렌초 기베르티), 우 - 유디트(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의 대표작 ‘키스(The Kiss)’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화가다. 그는 유럽의 예술과 사상의 중심지라는 소리를 들었던 19세기말~20세기 초의 빈이 낳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가 중 한 사람이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인물 중 음악계에 모차르트가 있다면 미술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1. 빈의 카사노바
 


32- 클림트.jpg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체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젊은 시절 열정적인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손재주와 어머니의 열정은 그의 황금기 작품들의 장식성과 상징성적인 조형의식으로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한계가 없어 보이는 그의 열정은 그를 빈의 카사노바로 불리게 했다. 그는 모델이었던 거의 모든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많은 여성 인물화를 남겼다. 여성의 그림 중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II’는 2006년 경매서 999억원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중 하나가 되었다.
 


32-  바우어의 초상.jpg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Adele Bloch-Bauer'),구스타프 클림트, 1907



빈에서 볼 수 있는 클림트의 초기 작품으로는 왕궁극장(Burgtheater), 미술사 박물관의 천장에 그려진 벽화들이 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화가 도나텔로와 보티첼리, 조반니 벨리니 같은 대가들의 스타일을 흡수해서 자신의 작품에 표현했다. 그는 1883년 링 거리를 만들던 시기에 역사주의적인 건물에 벽화를 그려달라고 의뢰를 받을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었었다.
 


32- 빈 미술사.jpg 


빈 미술사 박물관의 클림트 벽화



클림트는 동생이 요절한 후(1892년 사망) 슬픔에 빠져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다가 상징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예가 바로 교육부에서 의뢰받은 빈 대학 강당 천장 벽화다. 클림트는 ‘무지의 묘지에 비치는 희망의 빛’이라는 주제로, 신학, 철학, 의학, 법학 중 철학, 의학, 법학을 맡았었다.
그러나 여성의 나체들로 채워진 상징적인 철학과 의학 그림은 빈 전체를 술렁거리게 만들만큼 대단한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것을 본 교수들은 분노하여 위원회를 소집했고,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법학이 완성됐을 때 결국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32- 철학.jpg


철학 Philosophy,클림트



32- 의학.jpg


의학 Medicine, 클림트



32- 법학.jpg


법학Jurisprudence, 클림트



클림트는 이 작품들을 통해서 인간은 철학을 통해 깨달을 수 없고, 의학이 발전해도 죽음에 맞설 수 없으며, 권리는 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면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작품들을 빈 현대미술관에 전시하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클림트는 거절했다. 미리 받은 돈도 돌려주고 한동안 단지 그림에만 몰두했다.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쉽지 않았지만 클림트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후 그는 더 이상 아카데미 시절 같은 평범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유럽의 19세기말은 과학의 진보와 함께 실증주의, 합리주의 사상과 과학만능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가 일어난 시기였다. 또한 콩트의 실증철학에서 객관적인 세계 너머로 실세계를 모색하면서 신칸트학파의 관념철학으로 반전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프로이드의 저서 '꿈의 해석'이1902년에 발간되었고, 무선영화 '달나라 여행'도 제작되었다. 신문과 사진이 등장하고 전화를 이용하게 되었으며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이 곧 이루어졌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은 사람들의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감각을 변하게 했다.


결국 사람들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했으며 심지어 고립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또한 물품들의 대량생산으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에 위기의식까지 느끼며 세기말적 비관론에 빠지게 되었다. 즉,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 현 세계를 파괴해야만 새로운 세계가 태어날 수 있다고까지 믿었다.
이 시기 클림트가 있던 빈은 국왕의 문화정책으로 예술을 꽃피우며, 가정과 학교에서는 엄격한 도덕관념과 몸가짐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빈의 밤거리는 유럽에서 가장 싼 몸값의 거리 여자들과 그것을 즐기려는 남자들로 넘쳐났다.
프로이드가 인간의 성 문제를 연구한 곳도 빈이었고, 많은 학자들이 성과 심리학을 연구한 곳도 빈이었다. 이러한 빈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당시의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 상상의 세계, 비현실적인 세계 등 원시적 문명에 대한 강한 동경을 표현했다.


본능과 무의식, 병, 고독, 욕망, 질투, 시기, 절망 등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 겪는 현대인의 다양한 심리적 경험을 좀 더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색채와 선, 형태 등을 왜곡시켰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구스타프 클림트도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당시 예술과 문학에서 도발적인 주제였던 ‘여성’을 그리기에 몰두하면서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까지 거침없이 그려 나갔다.
 




32- '여성' 드로잉.jpg


클림트의 ‘여성’ 드로잉



2.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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