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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 대표 김영상 박사

by 유로저널 posted Dec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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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8일 (월),  넓직한 무대가 마련된 프랑크푸르트의 Saalbau Titus Forum 에 프랑크푸르트 근처에 거주하는 약 400명의 원로교민들이 모여 시종 웃음이 그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원로잔치를 가졌다. 한국문화회관 주최로 열린 이 원로잔치에는 성탄과 연말을 앞두고 60세 이상의 교민들이 초청되어 삼성유럽본부 (사장 양해경) 에서 제공한 맛있고 푸짐한 저녁뷔페식사를 나누고, 그 동안 문화회관에서 열린 강좌에 참석하였던 수강생들의 작품발표회를 보며 경품권 추첨도 곁들여져 저녁 6시에 시작된 이 잔치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진행되었다.

한국문화회관 개관 5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이번 원로잔치 준비를 위해 문화회관의 7명 자원봉사자들과 삼성유럽의 봉사단들인 삼성엔젤팀들과 함께 모든 세심한 준비를 하여 참석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였던 한국문화회관 대표 김영상 박사를 만나보았다.




유로저널 : 안녕하세요? 지난 원로잔치가 많은 원로교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원로잔치를 열게 되었는지요?

김영상 박사 : 2003년 12월에 프랑크푸르트 한국문화회관이 개관되었고 개관 1주년 및  2주년 기념식을 문화회관에서 원로교민들을 모시고 열었는데 제 3회째부터 문화회관 개관 기념 „원로의 밤“ 을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이충석) 과 삼성유럽본부의 협찬으로 프랑크푸르트 근처 Kronberg의 City Hall 에서 크게 열게 되었지요. 그 때 250여 명의 원로교민들이 참석하였고 작년에 Saalbau Titus Forum 에서 320여 명, 올해 5주년에 400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제 원로들이 상당히 기대하는 행사가 되었지요.


유로저널 : 현재 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강좌에는 어떤 강좌들이 있습니까?

김영상 박사 : 컴퓨터 강좌를 비롯하여 한글,한문서예와 음악강좌, 요가, 종이접기, 고전무용 등 7개 강좌가 열리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이 강좌를 수강한 수강생들이 415명이 넘지요. 문화회관을 그 동안 방문한 분들은 총 2만 9백여 명이나 됩니다.  


유로저널 : 앞으로 더 개설하고 싶으신 강좌가 있다면 어떤 강좌입니까?

김영상 박사 : 현재 7개 강좌만 해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오후반으로 시간이 모두 배정되어 있어서 더 강좌를 개설할 수 없는 포화상태입니다.  


유로저널 : 언제 독일에 오셨는지요?  

김영상 박사 : 1958년 9월에 먼저 비엔나에 왔다가 넉달 후인 1959년에 독일에 왔습니다. 저는 사실 처음에 미국으로 유학가기 위해 장학금까지 탔는데, 그 당시 제게 비행기값이 없어서 미국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문교부에서 유럽으로 유학갈 학생 4명을 뽑는데 그 장학금에는 여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로 오게 되었지요. 하노버 공대에서 디플롬을 마치고 스튜트가르트 공대 연구소에 2년 반 다녔습니다.


유로저널 : 반세기를 독일에서 생활하셨는데 독일과 독일인들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영상 박사: 모두 장단점이 있겠지만, 독일에서 사는 것이 좀 단순한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감정이나 혈연, 지연과 관련된 복잡한 인간관계에 덜 매이고 개인적이거나 부부 중심의 가정생활을 주로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아직 대가족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사는 한국에서처럼 정적인 관계가 부족한 점도 있지요.


유로저널 :  지난 해, 독일어로 자서전을 내셨는데 처음부터 독일어로 자서전을 쓰셨습니까? 아니면 한국어로 쓰신 후에 독일어로 번역하셨습니까? 자서전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영상 박사 : 처음부터 독일어로 썼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 교민들이 별로 없었고 제 주위의 사람들이 거의 독일인들이라 독일어로 썼지요. 사실은 처음부터 책을 내려고 쓴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30년간 근무하던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훽스트 회사에서 1994년 정년퇴직한 후에 시간을 잘 활용하려는 마음으로 2년간 피아노와 플륫을 배웠어요. 그러나 악기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아 그만두고 제 삶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지요. 10년간 써놓은 원고를 2005년 도서전 때 알게 된 한 독일출판사에게 보냈더니 원고량이 너무 많아서 줄여야 한다고  하여 책 한권 분량으로 줄이는 작업을 거쳐 작년에 출간하게 되었어요.    


유로저널 : 자서전 제목이 좀 특이하던데요. 제목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김영상 박사 : 제목이 „C- Ration“ 인데 „C“ 는 „compact“ 의 첫 글자이지요. 군대에서 전진할 때, 군인들에게 그 날 하루 세끼분의 양식을 컴팩트하게 만들어 담배 한갑까지 포함하여 나누어 줍니다.  어느 일정한 곳에 주둔하면 천막 취사장을 만들어 따뜻한 음식을 먹지만, 전진할 때에는 군인들에게 이렇게 „C-Ration“ 을 나누어주지요. 제가 6.25 전쟁당시 미군부대에 들어가 군인생활을 하였는데 이 자서전에는 전쟁당시의 제 군대생활이 기록되어 있고 1959년 독일에 오기 전까지의 삶이 담겨져 있습니다.


유로저널 :  사모님이 독일분이신데 어떻게 언제 결혼하시게 되었는지요? 사모님에 대한 자랑도 부탁합니다.

김영상 박사 : 제가 독일에 유학할 당시에는 한국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스튜트가르트 공대 연구소에 다니는 동안에 한 기독교 학생 단체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지금 제 처를 만났지요. 저는 화학을 전공하였고 제 처는 가정학을 공부하였어요. 제 처의 좋은 점이라면 적응력이 뛰어나고 수용성이 많다는 것이지요. 다른 문화나 예술, 생활양식 등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독일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데모를 많이 하는 나라라고 하는 등 비판을 하면 그러한 일이 일어난 배경이나 입장 등을 설명해주며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 옹호를 하곤 합니다.    


유로저널 : 독일에서 결혼하셨는데 부모님은 결혼식에 참석하셨는지요?


김영상 박사 : 부모님은 제가 한국에서 논산훈련소로 떠난 이후로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저의 고향이 개성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중고등학교 구분이 없었는데 제가 중학교 6학년때 6.25 전쟁이 일어났지요. 북한군들이 개성에 들어와 개성이 공산화되고 3개월 후에 미군이 들어왔을 때 제가 미군부대에 들어가 함께 평양 북쪽 100km 에 위치한 개천까지 전진하였어요. 중국군들이 들어와 1.4 후퇴를 하게 되고 38선을 지나 서울, 서울에서 수원, 오산, 조지원까지 후퇴를 하는 중에 제가 속한 중대원 33명중 거의 3분의 2가 죽었지요. 그 후 부모님들의 생사를 모르다가 2003년 이산가족찾기 때 제 처와 함께 평양과 개성 중간지점인 사리원에서 막내동생을 만나게 되어 부모님 소식을 들었어요.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저를 만나고자 하는 희망을 끝까지 붙들고 사시다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유로저널 : 그럼 동생을 몇 년 만에 만나신 것인가요?

김영상 박사 : 막내동생이 7살 때 헤어져서 54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지요. 만일 동생인 줄 알고 만나서 그렇지, 그냥 길가에 지나가다 스쳐 만난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유로저널 :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김영상 박사 : 제가 한국문화회관 일을 맡으면서 한국 교민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면서 제 자서전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발간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하면 아무래도 옛날 한국말이기 때문에 젊은 분이 번역하여 발간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난 자서전에는 제가 독일에 오기 전까지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독일에서의 삶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주로 한국교민들을 대상으로 문화회관 일을 해왔는데 장기적으로 독일인들에게도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금년에 독일 이주민족들의 통합과정을 연구하는 브레멘 대학 틸만교수가 저희 문화회관에 찾아오셨어요. 그 분에게 한국인들이 독일사회에 통합한 역사를 소개하며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있었지요.  


유로저널 : 직접 6.25 전쟁을 일선에서 겪으셨고 독일에서 반세기를 살아오신 삶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저희 후세들에게 큰 역사공부와 인생공부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한국문화회관이 계속 교민 여러분들의 문화생활의 요람이면서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홍보하는 역할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분단 반세기와 독일 생활 반세기를 직접 한 몸으로 겪으며 이중언어와 이중문화권 속에 생활하고 있는 김영상 박사는 집에도 한글로 책을 읽고 원고를 쓰는 서재와 독일어로 책을 읽고 원고를 쓰는 서재를 구분해놓고 있다고 말하였다. 김영상 박사는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모여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며 유대관계를 맺고 한독 과학기술교환 등 한국과학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 고문이기도 하다. 독일어로 쓴 자서전을 독일 친구들 앞에서 낭독회를 하는 가운데 한국을 잘 알릴 수 있었다고 말하는 김영상 박사. 그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통해 한국과 독일이 더욱 가까와지리라 믿는다.



(독일 유로저널) 유 한나 기자
hanna21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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