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0) - 바람의 기억

by eknews posted Mar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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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0) 
바람의 기억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비음은 조화를 이룬 이중창 같았다. 은지의 동그란 눈이 영미를 향했다. 
“아저씨도 아픈가 봐요.”
“아닐 거야, 걱정 말고 우리 공주님은 이제 꿈나라 갈 준비!”
영미는 은지의 손을 이끌고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소리가 멀어져 안심이 되었다. 은지가 이를 닦는 동안 영미는 욕실에서 나와 현관문에 귀를 댔다. 남자의 단말마적인 비음이 두어 차례 지나갔다. 은지가 씻고 나오자 영미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봐, 이모 말이 맞지? 이제 조용하잖아. 앞집 아줌마 아저씨 다 나은 거야.” 
은지가 현관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마침 남자의 말소리에 이어 미연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영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지를 식탁으로 데려가 약을 먹이고는 침대를 가리켰다.
“아, 따뜻하다! 우리 집도 이렇게 따뜻하면 좋은데.”
이불속으로 들어간 은지가 영미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여기서 같이 살까? 은지랑 엄마랑 이모랑.”
은지가 발을 동동거리며 손뼉을 쳤다. 영미는 이불 단속을 해주고는 정아가 돌아오면 국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냉동실에 있던 소고기를 조리대 위에 꺼내놓았다. 
보람 없이 피곤한 하루였다. 그 중심에 고바야시가 있었고 기싸마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했다. 정아가 고바야시를 따라 호텔로 가겠다고 했을 때 영미는 사실 울컥했었다. 생리적 현상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진 친구를 위해서 대신 수모를 감당하겠다는 친구의 태도가 우정 이상의 가치로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결코 감상적인 우정의 형태로 설명될 일이 아니었다. 미친개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정아가 지금 겪고 있을 경제적 압박감의 강도가 어떠할지 짐작이 되었다. 영미는 자신을 포함해서, 주위의 많은 아가씨들이 같은 종류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정아의 현재 상황이 그것과 여실히 닮아있어서 불안했다. 영미는 알고 있었다. 우리네 운명이라는 것이 때로 허허들판에서 준비 없이 소나기를 만나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을. 정아는 지금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먹구름 아래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졸음에 겨워하던 은지가 베개에 스르르 볼을 묻었다. 영미는 은지를 바른 자세로 돌려주고 전등을 끈 다음 은지 옆에 나란히 누웠다. 눈을 감고 애써 잠을 청했다.
잠깐 존 것 같은 데 그새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자정을 향해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영미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도 정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소식이 곧 희소식임을 잘 알면서도 영미는 뭔가 불안하고 불편했다. 갈증이 났다.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잡았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영미는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 사이 바람이 잦아들었고,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쓸리고 휘둘렸던 도시의 낮은 공간들 위로 흰 눈송이가 주렴처럼 쏟아졌다. 늦은 시간이라서 자동차도 사람도 뜸했다.
경철이 오빠네 가게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큰길을 두 번 건너자 눈발 사이로 눈에 익은 네온간판이 보였다. '청춘'이라는 초록 글자가 선명했다. 점멸하는 청춘을 보고 있노라면 그게 마치 오빠의 윙크 같아서 영미는 늘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간판이 주는 다정함과 싱그러운 느낌과는 달리 오빠는 언제나 무덤덤하고 무뚝뚝했다. 손님에게도 그렇지만 영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간혹 섭섭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걸 마음에 앙금으로 두지는 않는다. 오빠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영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미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서둘렀다. 
가게에는 손님이 한 테이블도 없었다. 오빠도 보이지 않자 영미가 톤을 높여 소리쳤다. 
“주인장 계시오? 여기 이쁜 손님 왔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제야 오빠가 주방에서 얼굴을 내밀고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었다. 
“설거지 좀 하느라고.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런 건 알바 시키지. 내가 도와줄까?”
오빠가 손을 저었다. 
“항상 알바가 해주고 가는데 아까 손님이 제법 있었거든. 알바도 바빴어. 뭐 좀 먹을래?”
영미는 이따 소주나 한잔하겠다고 말했다. 
경철이 오빠는 일본식 주점인 이 로바다야끼의 주방장이자 사장이다. 오후 6시에 문을 열어서 다음 날 아침 5시까지 영업을 한다. 손님이 적은 겨울철에는 홀에 직원을 한 명만 두는데 그도 12시면 퇴근을 해서 나머지 시간은 오빠 혼자서 가게를 꾸리는 것이다.
심심해진 영미는 카운터에서 판촉용 성냥을 가져와 용접놀이를 시작했다. 성냥개비 하나에 불을 당겨 다른 성냥개비 머리를 연결하는 놀이. 영미는 그것의 성공 여부로 그날의 운세를 점치고는 했다. 술에 취해 앞이 가물거려도 두 개의 성냥개비가 하나로 착 연결이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맨 정신에 정성을 다 해도 전혀 용접이 안 되는 때가 있다. 아무래도 오늘은 후자에 해당하는 날인 것 같았다. 
오빠가 주방에서 물고기 모양의 접시에 메로구이를 내오다 소리쳤다. 
“야, 너 그러다 가게 홀랑 태우면 오빠는 달랑 이거 하나만 남는다. 조심해.”
턱짓으로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주의를 주는 오빠를 빤히 쳐다보던 영미가 한쪽 입 꼬리를 낚아 올리며 시비조로 말했다.
“걱정 마, 오빠. 그런 일 생기면 오빠 보물 내가 인수할 게. 내가 날마다 마요네즈 발라서 호강시켜 준다.”
“아이고, 저 주둥이를 누가 막을꼬. 손님이 없어서 망정이지.”
용접이 거푸 실패하자 영미는 성냥갑을 테이블 위에 패대기쳤다. 
“에이 씨, 운세가 이 모양이니 오늘 계속 일이 꼬인 거야.”
“성질머리하고는! 참, 너 오늘 일 나갔다고 하던데,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끝난 거냐?” 
오빠가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누가 그래? 일 나갔다고?”
영미는 노릇노릇 구워진 메로 토막을 젓가락으로 먹기 좋게 해체했다.
“아까 미경이 다녀갔다.” 
“기싸마년이?  오늘 여기 왔었어? 일하러 갔을 텐데.”
“우림각 손님 모시고 왔더라.”
오빠가 잔을 채워 영미에게 주었다. 영미도 오빠 잔을 채워주었다.
“아니, 근데 이년이 왜 코스 이탈을 했지? 마담언니 알면 어쩌려고? 혹시 이년이 우리 오빠 노리는 거 아냐?”
자리에 앉은 오빠가 두툼한 배를 출렁거리며 웃었다. 
“손님이 단란주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써서 이리로 모셔온 거야. 노인네라 시끄러운 거 싫다고 해서. 대신 여기서 비싼 거 여러 개 먹었다.”
영미는 오빠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도톰한 살점을 집어 입에 넣어주었다.  
“가싸마가 또 어떤 말을 했어? 이실직고 해봐.”   
“그니까, 너 그날이어서 미경이가 대타 뛰려고 했는데 손님이 거절했다고 하더라. 근데 그놈 또라이 아니냐? 피를 좋아하는 흡혈귀인가?”
“오빠도 참, 우선 내가 이쁘잖우. 밤일도 기가 막히게 하고. 그래서 그런 거지.”
영미는 그렇게 말하고 부끄럽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빠가 영미의 귀를 잡아 길게 늘였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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