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30) - 바람의 기억

by eknews03 posted Aug 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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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30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영미가 쪽지를 내밀었다. 정아는 접힌 종이를 받아 손에 쥐었다.

  “어제 그 호텔 아니다. 거긴 결항 때문에 만실이래.”

  “그럼, 어디?”

  정아가 쪽지를 폈다. 연필로 갈겨쓴 글씨여서 글자가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호텔도 괜찮아. 전망은 오히려 어제 묵은 그랑드 보다 낫지. 바다 위에 지은 호텔이라 마치 유람선을 타는 느낌이 들거든.”

  영미가 엄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순간 정아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갈겨쓴 글씨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낯익은 얼굴 하나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서 출발하자, 내가 호텔에 데려다 줄게.”

  영미가 정아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정아는 혼자 가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따 저녁 식사는 호텔 건너편 복어집으로 가라. 그 호텔 뷔페가 유명하지만 고바야시는 번잡하거나 가져다 먹는 음식은 좋아하지 않거든. 가라오케는 호텔 지하에 있어. 거긴 커미션 같은 거 없으니까 굳이 우림각에서 왔다고 밝힐 필요 없고. 복어집도 마찬가지.”

정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길로 나온 정아는 영미의 등을 밀며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라고 말했다. 영미가 호텔에 내려주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 그 호텔에서 잔 적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

  정아의 설명에 영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누구랑?”

  정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은지를 내게 보낸 나쁜 남자랑.”

정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영미가 조심스럽게 은지아빠, 하고 물었다. 정아는 입술을 늘여 희미하게 웃었다.

  정아가 택시에서 내리자 영미가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아는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천천히 회전문 앞으로 갔다. 회전문은 마치 정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즉시 반응했다. 그날 나쁜 남자는 이 회전문을 통과하며 그렇게 말했다. 왜 회전문은 모두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지? 시계 방향으로 돌아도 문제없잖아. 세상에는 왼손잡이보다 오른손잡이가 많아서 그런 걸까? 아니 어쩌면 흐르는 시간을 제어하고 싶은 인간의 장수 의지가 반영된 건지도 몰라. 형이상학적으로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 그는 그렇게 시종 태평했지만 정아는 그와는 반대였다. 남자와 처음으로 호텔에 온 정아는 그게 무슨 은밀한 음모에 가담이라도 한 것 같은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했다.

  로비로 들어선 정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정으로 높게 솟은 두 개의 커다란 대리석 기둥 사이로 호텔 로비의 풍경이 차분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 5년 사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나쁜 남자가 호텔 숙박권을 품에서 꺼내 제출했던 프런트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오른편의 방문객 전용 소파 세트마저도 예전 것 그대로였다. 변화가 있다면 프런트 건너편 커피숍 경계에 종려나무 울타리가 듬성듬성 생긴 것 정도였다. 정아는 백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소파를 향해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힐의 뒤축에서 올라오는 경쾌한 울림이 호텔 특유의 정제된 소음들과 함께 귀를 통해 들어왔고, 커피숍에서 종려나무 잎사귀를 지나온 부드러운 모카골드향이 코를 자극했다.

  정아는 소파에 앉아 커피숍을 에둘러 살폈다. 한산한 로비와는 달리 커피숍은 자리가 채워져 생동감이 넘쳤다. 혹시 고바야시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특별히 낯이 익은 얼굴은 없었다. 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정아는 휴대폰을 열고 영미에게 문자를 찍은 다음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아오자이 형식의 롱스커트를 입은 호텔리어가 정아 옆을 지나가며 목례를 했다. 정아도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보냈다. 아가씨는 정아 앞을 지나 프런트 쪽으로 갔다. 걸을 때마다 스커트의 옆트임 사이로 드러나는 가늘고 긴 다리에 절로 시선이 갔다. 정아는 프런트를 바라보았다. 진청색 수트 차림의 남자와 아이보리색 정장차림의 여직원이 투숙객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정아는 진청색 수트의 얼굴을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스프레이로 살짝 숨을 죽인 2:8의 가르마가 눈에 익었다. 그날 숙박권 문제로 남쁜 남자와 다투었던 직원이 분명했다. 주중에만 쓸 수 있는 숙박권을 주말에 가져와 사용하겠다고 억지를 쓰는 남자에게 끝까지 인내심을 보였던 직원. 자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호텔 로비 안에 가득 채워서 끝내 객실을 얻어낸 나쁜 남자를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5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승자는 간 데 없고 패자처럼 보였던 직원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정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트의 시선이 정아에게로 왔다. 정아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미소를 보내왔다. 정아도 가볍게 웃어주었다. 정아는 수트 앞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지금 저 자리에 나쁜 남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피사체가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동시에 등줄기로 아릿한 통증이 푸른 섬광처럼 꽂혔다.

  전화벨이 울리자 정아는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영미가 곁에 고바야시가 있느냐고 물었다. 정아는 아직 로비라고 말하며 한 손으로 백에 넣어두었던 쪽지를 꺼내 객실 번호를 확인했다. 영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말이야, 보일러 기름 부르려고 네 집에 왔는데 참 요상한 일이 벌어져 있다.”

정아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혹시 미친개가 와서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뭐 나쁜 일은 아니고 좀 기특한 일이 벌어져서 말이야. 와서 보니까 내가 주유소에 연락할 필요가 없었어. 이미 주유소 차가 와서 기름을 넣어버려서.”

  “주유소 차가? 난 안 불렀는데.”

  정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알지. 그래서 막 출발하려는 차를 세워서 물었어. 그랬더니 아저씨가 저편에 삐까뻔쩍한 외제차를 가리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우아하게 달려가서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지. 뽀뽀라도 해줄라고. 그랬더니 문틈으로 주유 영수증만 달랑 내밀고는 쌩 사라져버리더라. 내가 잡아먹을 줄 알았나봐.”

영미가 까르르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 보일러 켜보니 잘 돌아간다. 약하게 켜놨으니 내일쯤은 아주 따뜻할 거야. 은지는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객실로 올라가.”

  정아는 고맙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쪽지를 확인한 다음 천천히 승강기를 향해 걸었다. 객실 앞에 이르러 정아는 객실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벨을 누르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가운 차림의 고바야시가 팔을 벌렸다. 단단하게 팽창한 고바야시의 성기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불거졌다. 고바야시는 정아를 번쩍 안아서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가운을 거칠게 벗어던졌다. 몸을 일으키는 정아를 그는 찍어 누르듯 덮쳤다. 그러고는 정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성기를 쥐게 한 다음 나직하게 말했다.

  “비행기 결항되었다고 하니 얘가 어찌나 좋아 펄펄 뛰는지 말이야. 오후 내내 이렇게 일어서서 그대를 기다렸다오. 우선 얘 뽀뽀 좀 해주지.”

  고바야시는 상체를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의 성기가 정아의 얼굴 위에서 요동쳤다. 정아는 몇 차례 얼굴을 돌려 피하다가 결국 입을 벌렸다. 정아는 눈을 감은 채로 대책 없이 흔들렸다. 입이 얼얼해질 무렵 고바야시는 씻고 와서 하자며 몸을 뺐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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