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47)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Jan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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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밤의 꽃

“회장님을 모시다니? 그럼 혹시...”
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눈이 동그래진 정아가 목소리를 높여 불뚝성을 냈다. 
“진정해. 일단 지시가 떨어지면 묵묵히 이행해야 하는 게 여기 불문율이야.”
“불문율? 오너에게 성상납을 하는 게?” 
“누가 듣겠다. 그건 그래도 양반이지. 다른 성접대도 많아. 단속과 지도 권한을 가진 공무원들에게 하는 보험성 접대도 있고, 하다못해 공생 관계인 호텔의 지배인이나 객실과장에게도 접대를 해야 할 때가 있어. 성수기 객실 배정이나 현장 단속 때 암암리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러니 위에서 접대 지시가 내려오면 군말 없이 나가야 해. 우림각의 안녕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우린 그걸 재능기부라고 하지.”
뭐, 재능기부? 하고 되뇐 정아가 헛웃음 끝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다들 너처럼 반발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재능기부가 일종의 커미션이라는 걸 실감하지.”
“세상 천지에 직원에게 커미션을 받는 오너가 있을까? 그것도 성으로.”
“여기 있잖아. 그리고 믿기 어렵겠지만,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회장님과의 잠자리는 다들 원하는 분위기야. 기회가 있다면 가고 싶어 하는.”
정아가 영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 회장님을 모시면 성은을 입었다고 다들 부러워하지.” 
“성은이라고? 갈수록 태산이구나. 우림각이 무슨 왕궁이니?”
“여기는 강 회장의 왕궁이지. 아니 황궁.”
“아가씨들은 궁녀나 무수리고?”
“빙고! 지금은 장 마담이 아가씨 채용과 영업의 전권을 쥐고 있지만, 전에는 그걸 회장님이 직접 관여했어. 신입이 들어오면 직접 면담을 하고 그 중 미모가 뛰어난 아가씨를 따로 불러서 즐겼지. 그렇게 회장님 접대를 한 아가씨는 장 마담이 따로 대우를 해주었거든. 일감을 꾸준히 몰아주거나 VIP 손님에 배정을 해주는 식으로.”
“그랬다 쳐도 이상하잖아. 난 회장님과 일면식도 없는데 접대를 해야 한다는 게.”
“그건 장 마담께 물어봐. 그 언니 결정이니까. 모르긴 해도 언니가 그만큼 너를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이니 너무 속상해 하지는 마라.”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니?”
“그래. 우림각 일을 포기하면 몰라도.”
성긴 눈발이 하나 둘씩 날아왔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난 회장님 면담이라고 해서 저번에 마담께 부탁한 선불금에 대한 말씀이 있겠구나 싶었지...”
“물론 그것 때문에 불렀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부가적이라는 거야.”
정아는 양손 중지로 관자놀이를 서너 차례 압박한 다음 다시 영미를 바라보았다. 
“밤새 모셔야 하는 거니?”
“그건 회장님 재량. 듣기로는 자정 전에 끝나는 경우가 많았대.”
“듣기로는? 그럼 넌 회장님 접대를 하지 않았다는 거야?”
“유감스럽게도! 내가 머리를 올릴 즈음에는 예쁘고 잘난 애들이 너무 많았거든. 게다가 난 룸싸롱 출신이잖니. 신선미라고는 약에 쓰려고 찾아도 없는.” 
불현듯 영미가 정아의 소매를 헤집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회장님은 별실에 계신다.”
우두커니 서 있는 정아의 등을 떠밀며 영미가 말했다. 정아의 눈에 설핏 물기가 비쳤다. 영미는 시선을 비껴내며 어서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참, 너 고바야시 접대한 거 비밀로 하라는 마담언니의 당부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두어 걸음 옮긴 정아의 등에 대고 영미가 말했다. 돌아선 정아가 한참이나 영미를 바라보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5. 밤의 연가

정아의 남색 프렌치코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영미는 느릿느릿 ‘청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출입문에 이르러 잠시 옆의 수족관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진 직사각형의 좁은 바다 안에서 고기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유영 중이었다. 장어는 구석에 머리를 맞대고 탈출구를 탐색하는 모양새였고, 황돔들은 정중동의 꼿꼿한 자세로 눈을 굴렸다. 광어는 아예 바닥에 배를 깔고 죽은 듯 졸고 있었다.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건 유리벽에 오순도순 붙은 몇 마리의 전복뿐이었다. 
갑자기 출입문이 열렸다. 경철의 손에 뜰채가 들려 있었다.    
“어, 추운데 여기서 뭐하니?”
 경철이 영미의 머리에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주며 말했다.   
“얘들에게 어서 도망을 치라고 얘기해주고 있는 참이야. 곧 집행관이 온다고.”
“지랄, 근데 왜 혼자야? 친구랑 같이 온다고 했잖아.”
경철이 수족관의 뚜껑을 열고 뜰채를 집어넣으며 물었다. 영미는 친구가 여기까지 왔다가 사정이 생겨서 급히 갔다고 대꾸했다. 구석에 몰린 고기 하나를 뜰채로 낚아챘다. 파닥거리는 고기를 앞세우고 영미는 경철을 따라 가게로 들어갔다.  
“친구랑 온다고 해서 전복죽까지 끓여놨는데.”
경철이 한쪽 테이블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헐, 이 곰탱이 오라버니 하는 짓 좀 보소. 나 혼자 올 때는 전복죽은커녕 따뜻한 물 한 잔도 안내면서. 이쁜 여자 온다니까 저리 가득 차려놓다니.”
“무슨 소리야. 전복죽은 우리 영미 몫이지.”   
경철이 파닥거리는 고기를 손으로 누르고 머리를 고무망치로 내려치며 변명조로 대꾸했다. 
“그 친구에게 이 황돔을 주려고 한 건데, 아쉽다.”
“햐, 나를 두 번 죽이는구나. 그러니까 나한테는 죽을 먹이고 내 친구에게는 회를 먹이시겠다. 이런 나쁜 놈 같으니라고.”
경철이 고무망치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싱긋 웃었다. 영미는 오늘 왠지 경철에게 계속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정아를 보내고 난 후 까닭을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생각이 자꾸 삐뚤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기는 다시 살려놔. 다음에 친구랑 와서 먹을 테니까.”
“벌써 운명하셨다.”
“인공호흡이라도 해.”
경철이 해체가 시작된 고기를 들어보였다. 영미는 순간 경철의 손에서 고기를 빼앗아 다시 수족관에 넣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영미는 테이블로 가서 선 채로 잔에 소주를 따라 들이켰다. 경철이 급히 회 한 점을 가지고 와 영미 입에 넣어주었다. 경철의 차가운 손가락이 입술에 닫자 이상하게도 영미의 마음이 일순 따뜻해졌다. 
영미는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이 하얀 주렴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주렴은 곧 사선으로 흔들리다 흐트러졌다. 눈송이가 흰나비처럼 일제히 날아올랐다. 조금 전 정아와 서 있었던 자리가 흔적도 없이 하얗게 지워졌다. 
영미는 함박눈을 맞으며 눈사람처럼 걸어가고 있을 정아를 떠올렸다. 우림각 입구까지라도 같이 가줄 걸 그랬다 싶은 후회가 마음을 아프게 후볐다. 난 왜 이렇게 후회만 하고 살까, 영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빠, 오늘 밤 나랑 데이트 좀 할까?”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영미가 경철에게 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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