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원의 사회칼럼

영화로 세상 읽기 (16): 하모니

by 편집부 posted Jun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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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 읽기 (16): 하모니



인생이 무엇인가? 답을 원한다면 부족함이 없는 풍족함 속에서가 아니라, 삶의 가장 밑바닥인 빈곤함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인생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의 삶에선 그 이론을 적용할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개인에게 주어진 삶은 영원하지 않으며 호흡이 있을 때만 유효한 것이다. 삶이 순탄하다면 오히려 그 순탄함으로 병들게 되어 있다. 험난한 파도와 싸우며 항해하는 것이 인생이다. 생각지 않게 들이닥치는 성난 파도를 극복해야 하고, 평온하며 잔잔한 바다 위에서의 삶일 때는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인간이 목숨 걸고 살아가는 삶에는 존귀한 삶이 있거나 천한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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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은 존귀한 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자신들의 우월성을 나타 내려한다. 이러한 존귀한 삶의 집단을 구분 짓는 무리가 있다면 당연 천한 삶으로 낙인찍히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존귀하거나 그렇지 못한 삶을 구분할 때 그 기준은 물질의 풍요로움, 가진 권력에 둔다.


오래 전 한국에서 학원사업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시킨 적이 있었다. 대부분 행사는 유명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작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을 초청했다. 호텔 측에서는 먹는 음식, 필요한 부대시설과 특별한 가격으로 객실을 제공해 주었다. 호텔 입장에서는 나라는 사람은 존귀한 존재 그 이상이었다. 


언제나 호텔 입구에 들어서면 호텔 관계자들이 달려 나와 내 요구사항을 들어 주었다. 그만큼 호텔 입장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수입을 안겨 주었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내가 그 많은 돈을 지불하려는 고통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삶이 윤리적으로 깨끗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결제액이 다른 사람보다 많기 때문에 일등고백으로 대우 해 줄 뿐이었다. 인생은 삶의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출을 받으러 가기 위해선 좋은 차를 타야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며, 좋은 곳에서 관계자를 만나야 은행에서 거액의 돈을 빌릴 수 있다 했다. 물론 옛 이야기지만 그 말을 들으니 서글퍼진다. 돈이 없기 때문에 은행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잘 보이기 위해서 또 다른 빚을 먼저 얻어서 차를 바꾸고 환경을 바꿔 돈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의 내면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외형적인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겪는 서글픔일 것이다.



영화 <하모니>를 통하여 인생이 가진 작은 것의 소중함을 배우게 된다. 영화의 대부분은 여자 교도소에서 진행된다. 등장인물들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여성 중범죄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잔잔하게 들여다보면 그러한 중범죄를 범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거나 원인제공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적으로는 의로운 사람들이 되었으며, 그것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죗값을 평생 치르게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들 나름대로 선함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법으로 죄를 피한 자들은 교도소 밖에 살고 있다지만 자신의 삶을 뉘우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도소 안에 있던 죄인들은 의인으로 정화되기도 하지만, 자칭 의인이었던 교도소 밖의 사람들은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주인공 ‘정혜’는 고아로 자랐다. 그가 세상을 알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남편은 그를 학대한다. 이유는 그의 존재 자체가 존귀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의처증과 연속되는 구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방어한 것이 살인으로 연결된다. 그 와중에 생명을 잉태한 채로 주인공은 영어의 몸이 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곳, 그리하여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새 생명을 출산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진짜 인생을 배우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을 통하여 인생을 들여다본다. 


그녀가 깨달은 인생은 특별한 것에 있지 않았다.

지극히 작은 것들이 모여 인생이 됨을 배운 것이다. 영화를 관람하는 나 역시 그러했다. 큰 것만을 추구하였기에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잃어 가고 있다. 그녀는 내게 말한다. “인생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길 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 작은 것, 아침에 눈을 뜨고, 주어진 일상을 시작 하는 것, 걸음걸음의 소중함, 호흡의 소중함, 하늘의 소중함, 풀 한포기와 주변 환경의 소중함, 그러한 소중함이 모이고 모여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은 생명의 출산과 영화의 마지막은 음대 교수로서 남편과 그 정부를 죽인 죄로 사형수의 삶을 살고 있는 ‘김문옥’ 여사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태어나서 죽음까지 그것이 인생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삶만이 존귀함을 구분 지으려 한다. 그러나 인생은 평등하다. 사람을 짓밟은 인생이 존귀해 질 수 없다. 사람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금자탑을 쌓았다 할지라도 그 탑은 무너져야 한다. 비록 천하게 느껴지는 삶이라 할지라도 존귀한 것이요, 죽음으로 연결되는 인생 여정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세상은 그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우월성을 나타내려 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 하고 있다. 삶이란 작은 것은 소중함을 느끼고, 실천하는 자만이 존귀한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모든 인생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진리이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존중 받아야 하고, 또한 존중해야 한다. 최근에는 갑질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핍박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뿐 아니라 초대교회 시대에도 차별은 사회적 문제였다. 야고보서에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가진 자들은 구별된 앞자리에 앉게 하였지만 초라한 옷을 입고 빈곤한 자들이 교회에 오게 되면 그들을 무시했다는 기록이 있다.(약2:1-5) 초대교회 뿐 아니라 현대 교회도 그러하니 세상은 오죽하겠는가? 사람 차별을 없애기 위해 사도 바울은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당부했다.(살전5:26, 롬16:16, 고전16:20) 실제로 지구상에 인사하는 민족 중에 입맞춤이 보편적인 인사법을 가진 나라는 없다. 


서양이 입맞춤 인사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입맞춤이 아니라 양 볼에 형식적으로 입을 맞추어 소리를 낼 뿐이다. 사도 바울이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차별을 금지하라는 의미였다. 당시 유대교의 고위급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인사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입맞춤이었다. 그래서 어디에서든지 그들의 인사법을 보고는 사람들은 존경의 표시를 해야만 했다. 그러한 사회적 위압감이 교회 안에서도 실행했다. 최고로 존중한다는 의미의 인사법을 사도 바울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 즉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라 할지라도 서로 존중하는 인사를 하라는 당부였다.



인간이 존재한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진 자들은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차별했다. 기업의 총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회적으로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핵심주제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공평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쉼 없이 가진 자들은 문턱을 스스로 낮추어 인생하모니를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있다. 굳이 프랑스 말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용어를 끌어 들이지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사람다운 사람이며, 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게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생은 한 번뿐이다. 그 한 번의 생은 평가받도록 되어 있다. 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가는 결국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다. 잠시 잠깐 자기 유익만을 위해 사람을 업신여긴다면 그 사람역시 그를 창조한 조물로부터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약2:13)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기업이라면 당장은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 기업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아서 사회적 바람이 불 때 기업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기업,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탱하는 하모니가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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