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5)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Oct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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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5) - 바람의 기억


6. 낮달의 시간 


정아를 본 은지가 콩콩 뛰며 반겼다.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줄 알았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아는 봉지에서 불고기버거를 꺼내 은지 손에 쥐어주고 치킨은 펼쳐서 상에 놓아주었다.

"엄마 이따 나가야 해. 근데 우리 딸 요즘 이렇게 기름기 있는 것만 먹어서 어떡하지?”

근래 미친개가 사다준 피자며 치킨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은지가 버거를 흔들며 아이, 괜찮아 하고 명랑하게 외쳤다. 

"엄마는 우리 딸이 혹시 저팔계처럼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정아가 아름드리나무를 껴안듯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다음에 미친개아저씨가 또 피자나 치킨 가져오면 이젠 그만 먹겠다고 해.”

"왜요, 맛있기만 한데.”

은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은지는 이미 미친개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을 털어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은지가 빈 방에서 종일 혼자 있을 때 먹을 것을 사들고 찾아와 놀아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저씨는 이제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근데 계속 받아먹으면 되겠니?”

"이제 안 괴롭히잖아.”

"그야 그렇지. 빌린 돈 다 갚았으니까. 그러니까 우린 아저씨와 더 만날 이유가 없단 말이지. 그 아저씨가 우리 은지에게 맛난 것 사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한 일이야.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거든.”

은지가 잠시 오물거리기를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혹시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좋아하는 건가?”

정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맞는 말이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어느새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자랐나 싶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엄마는 아저씨처럼 욕을 잘 하거나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오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

정아는 부러 심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은지가 오물거리다 무심한 어투로 옹잘거렸다. 

"아저씨 이제 방에 들어올 때 신발 벗고 오는데. 그리고 이제 아저씨가 자기 미친개라고 부르지 말래.”

"그럼 뭐라고 불러.”

"산타 아저씨래!”

"미친놈!”

정아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거친 대꾸에 속으로 아차 했다. 버거를 입에 문 은지가 동그란 눈으로 정아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나쁜 말 써서 미안, 미친놈이라는 말은 취소. 그렇지만 피자나 치킨을 몇 번 사왔다고 해서 미친개가 산타가 될 수는 없어.”

은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은지는 좀 혼란스러운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아는 치킨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바싹한 식감과 함께 달달한 소스가 혀에 감겼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 정아는 옷을 갈아입고 방 청소를 시작했다.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에 넣고 청소기를 돌렸다. 

정아는 따뜻한 방에서 냉기로 가득찬 욕실을 오가며 새삼 보일러가 얼마나 고마운 기기인지 실감했다. 기름이 떨어져 속수무책으로 떨어야 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아프게 떠올랐다. 

우림각에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모자는 어떤 모습으로 이 추운 겨울을 나고 있을까. 온전하게 숨을 쉬며 살아있기나 할까? 한 겨울의 이런 소소한 안정과 평화가 앞으로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는 은지를 위해서라도 어서 이 다찌 생활을 청산해야 하는데.... 정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정아는 서둘러 옥탑방을 나섰다. 미친개가 지정한 호텔은 집에서도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정아가 방파제로 산책을 나갈 때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는 했던 호텔. 오늘도 객실 테라스에는 잔을 부딪치고 있는 커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회전문을 통해 로비로 들어섰다. 정아는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를 이끌고 천천히 걸었다. 프런트를 지나 승강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승강기의 투명한 유리를 통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막 잠기는 중이었다. 주변이 온통 복자기 단풍잎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시야를 당기자 발아래로 방파제가 보였다. 방파제를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난장이가 되었다. 

승강기 문이 열렸다. 정아가 막 복도로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앞을 가로 막고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형수님!”

놀란 정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검정 넥타이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답답한 모습,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낮에 미용실에서 인사를 드린 강병철입니다.”

정아는 그제야 아, 하며 목례를 했다. 그가 몸을 틀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검정 양복에 짧은 머리며 넓은 어깨도 그렇지만 팔자로 걷는 걸음걸이까지 미친개와 너무나 흡사해서 마치 친형제처럼 느껴졌다. 걸음을 멈춘 그가 벨을 눌렀다. 문이 열렸고 진홍색 가운을 걸친 미친개의 모습이 보였다. 

"모셔왔습니다, 형님! 그럼 저는 커피숍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형님!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형님!”

그가 구십 도로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말끝마다 ‘형님’을 연발하는 그의 독특한 말투 때문에 정아는 하마터면 대놓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미친개가 손을 들었다 내리자 그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허리를 접고는 돌아섰다. 

"그쪽 세계는 섹스도 광고를 하고 하나보죠?”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광고는 무슨, 귀한 분 안전하게 모시는 게 저 친구 임무요. 자, 들어갑시다.”

그가 정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투가 다정해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아는 안내에 따라 침대 옆 소파에 앉았다. 탁자에는 맥주 세 병과 과일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맥주를 따서 잔 두 개에 차례로 따랐다. 이어진 건배.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정아도 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정아는 메론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정아를 응시했다. 짙은 눈썹과 치켜 올라간 눈매가 사찰의 일주문에서 본 보살의 그것과 흡사했다. 정아는 얼른 시선을 비껴냈다. 

맥주 세 병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가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다시 채워 거푸 건배를 해대는 통에 정아도 덩달아 서둘러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하지.”

정아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아는 지금 그간 은지를 챙겨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이어 강 회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폭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의 벨트를 풀었던 것이다. 

"뭐가 그리 바쁘세요, 숨 좀 돌리고 해요.”

정아의 만류에도 그는 거칠게 가운을 벗어던졌다. 

"우리 아이가 욕조에 물을 받아두었으니까 같이 들어가 다정하게 씻자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정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짝 독이 올라 이편을 노려보는 미친개의 성기를 바라보며 정아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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