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의 프랑스이야기

프랑스 문화 예술 산책 -테오와 함께- 알몸으로 다가오는 예술

by 편집부 posted Jan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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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화 예술 산책 -테오와 함께- 알몸으로 다가오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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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Emile Zola 1868년 165x114cm 오르쎄미술관


1884년 마네가 죽은지 1년 후 뽈 듀랑 뤼엘이 마네의 작품 159점을 경매 시장에 만 프랑에 내 놓았을 때 아무도 경매에 응한 사람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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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랑 뤠엘 초상화 1910년 오귀스트 르느와르 


 1889년 끌로드 모네는 동료 화가 마네의 작품이 국립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서명을 받기 시작하였고 결국 작품은 국가로 귀속되었다.


"우리가 마네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추모는 그의 작품이 국립박물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작품을 받지 않으려는 관계 정부 당국과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어렵게 작품들을 기증할 수 있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모던 올림피아는 1865년 스캔들을 일으킨 에두아르 마네의 올렘피아에 대한 화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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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Paul Cezanne 모던 올렝피아 Une moderne Olympia

1873-1874년 유화 46x55 cm 오르쎄미술관 



세잔도 자신이 잠겨 있던 어두움의 색체에서 벗어나 70년대 화려한 색깔로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아마 피싸로 선배의 덕분일거다.

밝은 빛과 튀는 색깔은 더 이상 세잔에게 어색하지 않다. 터질듯한 밝은 색깔은 프라고나르 선배의 기법을 세잔화한 것이다. 이 색깔의 변화는 오배르 쉬르 와즈의 가쉐 박사 집에서 머물 때로 생각된다. 그의 붓질과 팔렛트는 어두움을 벗어나 색깔과 빛이 달라졌다. 


마네가 그렸던 주제보다도 더 도전적이고 강렬하다. 검은 피부의 하녀가 벗겨낸 이부자리에서 올렝피아는 알몸을 화려하게 드러낸다. 

검은 양복을 걸친 세잔을 닮은 신사는 관객으로 올렝피아를 감상하고 있다. 장면은 연극의 한 장면이고 에로틱하기도 하고 포르노그래픽하기도 하다. 장면은 왼쪽에 내려진 커튼으로 더 연극적이다. 


1874년 첫번째 인상파 전시회 때 대중의 조롱과 비평을 심각하게 받은 작품이다. 1874년 예술가 잡지에 마르크 드 몽띠포 Marc de Montifaud는” 관능적인 환상과 같이 이 가공의 파라다이스 구석은 가장 용감한 자들을 숨막히게 한다. ….세잔 선생은 이 정신착란을 그리면서 스스로 미친놈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 기록했다. 




문학과 예술이 전해 주는 편지  -편지가 전해 주는 문화와 예술


침묵의 모티프로 회화에 가끔 등장하는 편지는 문학의 장르에 주로 언급되고 서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편지는 대화의 연장에 있으면서 여성적이고 살롱에서 주로 주고 받는다. 문인이라는 이름을 얻기 어려운 여인들은 서신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한 문인의 사회적으로 숨겨진 여인으로 줄리에트 드루에 여인은 50년간 일만팔천통의 편지를 썼다.


깔랑드 드 샹마르땡 Calande de Champmartin

줄리에트 드루에Juliette Drouet 네그로니 공작부인 역의 연극포스타 Juliette Drouet dans le rôle de la princesse Negr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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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에트 드루에Juliette Drouet 

1806- 1883연극 배우였고 50년간 빅토르 위고와 동행한 여인이다. 

조실 부모하여 삼촌의 손에 양육되었다. 1825년 당대 유명한 조각가 잠므 프라디에James Pradier의 애인이 되어 꽁꼬르드 광장에 세워진 스트라스부르를 상징하는 조각상의 모델이 되어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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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므 프라디에와 딸 끌레르를 얻었다. 프라디에의 충고에 따라 1828년 연극 배우로 데뷰한다. 연기력은 없고 미모만 갖춘 여배우는 무대보다는 미모로 많은 관객을 유혹할 수 있었다. 1833년 빅토르 위고의 연극 뤼크레스 보르지아에 네그로니 왕비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 배우로 실패하고 은둔 생활하며 오직 바깥 세상으로 외출은 위고와 동행을 조건으로, 빅토르 위고의 연인으로 평생 남기로 동의하였다.


그들의 관계는 시인의 부인과 가족들에게도 다 알렸다. 1852년 끌레르가 죽었을 때 빅토르 위고와 죽은 아이의 아버지 잠므 프라디에가 장례 행렬의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줄리에트는 장례식에 참석할 기력을 잃었다. 


1852년 빅토르 위고가 노르망디 앞 바다 영국령의 작은 섬 제르세Jersey로 그 후1855년 게르네제 à Guernesey로 망명길에 올랐을 때도 줄리에트가 동행하였다. 

빠리 공성 시절인1875년 9월25일 빅토르 위고는 정국의 불안으로 위기를 느끼며 편지로  자식들에게 몇가지 훈시를 내렸다. 그 중 자기 연인 줄리에트에 대하여 


<< J.D

이 여인이1851년12월 나의 목숨을 구했다. 나를 유배지까지 따라왔다. 그녀의 영혼은 나의 영혼을 떠난 적이 없다. 나를 사랑했던 자들은 그녀를 사랑해라, 나를 사랑했던 자들은 그녀를 존중해라. 그녀는 나의 미망인이다. 

V.H>>


편지는 답을 요구함으로 대화의 수단이다. 주고 받는 대화는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내화보다는 내용이 심오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빅토를 위고에게 보내는 이만통에 가까운 편지는 수신인이 없는 일기와 같은 독백의 편지였다. 여인의 사랑과 열정 그 영혼은 그 편지에 녹아들었다.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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