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제96회)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Jan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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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연재소설 (96)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감으니 소가 보였다. 왕방울 눈을 껌벅거리며 묵묵히 트럭에 오르던 소. 그동안 다섯 번이나 새끼를 낳아주고 철따라 농사일을 도와준 인연 때문일까, 마치 가족과의 이별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한동안 흔들리며 졸다가 문득 눈을 떴다. 누군가가 심하게 코골이를 했던 것이다. 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둘러보는데 주위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려있었다. 아따, 운전하며 지금까지 들어본 콧소리 중 최곱니다. 하하하. 기사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서녘의 노을처럼 붉어졌다.
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잔등 하나만 넘으면 동네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었다. 이윽고 차가 고개 위로 올라서자 손을 뻗어 벨을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아버지의 시야에 뭔가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동네 초입에 사는 박씨가 자기 밭둑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저 어른이 망령이 들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늘여 다시 보니, 그는 손에 뭔가를 잡고서 사정없이 밭둑을 내려치고 있었다. 얼른 봐서는 도망치는 뱀이나 쥐떼를 잡도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깊은 계절에 언 땅을 기는 뱀이나 쥐떼가 있을 리 없었다. 강풍에 흩날리는 흙먼지 때문에 자꾸 시야가 흐려져서 똑똑히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좀 생경한 풍경이었다.
박씨의 행동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가 별안간 밭둑 끝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밭둑이 끝나는 지점에는 그의 축사가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머, 저걸 어째! 그제야 아버지는 밭둑에서 번지고 있는 불을 보았다. 불은 순식간에 밭둑을 까맣게 태우고는 축사를 향했다. 차 좀 세워요! 아버지가 창을 거칠게 때리며 소리쳤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아버지는 축사를 향해 내달렸다. 팔을 내저을 때마다 풍경소리가 요란했다. 다가갔을 때 불은 막 축사로 번지고 있었다. 안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기진해서 무릎을 꺾고 있는 박씨를 불길이 빗긴 곳으로 끌어다 놓고는 윗도리를 벗어서 머리에 덮어썼다. 그러고는 축사로 가 문을 박찼다. 다시 또 강풍이 몰아쳤다. 바람이 불씨를 축사 위로 뿌려댔다. 아버지는 고삐를 정신없이 풀었다. 아홉 개를 모두 풀었을 때 불은 머리 위까지 와 있었다. 아버지는 불을 피해 반대쪽 문으로 뛰었다. 소들이 아버지 뒤를 따랐다. 뒤통수에서 불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박찼다. 하지만 문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문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소의 울음소리가 다시 터졌다.
불은 삽시간에 축사를 삼켜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아버지는 축사 뒷문에서 보리새우처럼 허리를 꺾은 채 소들과 함께 누워있었다. 아버지는 두 팔로 복부를 감싸고 있었는데, 안에 까맣게 그을린 전대가 보였다. 전대를 펼치자 지폐들이 파란 나뭇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
정아의 표정이 굳어지자 기남이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아파하지 마라. 좋은 일 하시다 가셨으니까 하느님이 큰상을 주셨을 거야.”
그랬으면 좋으련만.”
정아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 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신문이고 방송에서 아버지 사고 소식을 얼마나 크게 떠들었니. 딸내미 등록금 마련하러 나갔다가 그리되셨다고...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사랑하는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이 괴로운 짐... ”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냥 사고였잖아. 이제 잊어버려. 기자 놈들은 뭐든 부풀리기를 좋아하잖아. 그로인해 남이야 죽든 말든 말이지.”
기남이 정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영미가 은지와 장난을 치고 놀다가 한마디 했다.
좋은 날 왜 그렇게 심각하냐? 네가 그러니까 기남 씨 식은 땀 흘리잖아.”
영미의 타박에 기남이 손을 내저었다.
부판이라는 벌레가 있대.”
정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판?”
. 태어나서부터 저보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날이면 날마다 죽을힘을 다해 높은 곳으로만 올라가는 벌레. 그래서 마침내 힘이 다해서 스스로 마지막이구나 싶은 판단이 서면 가장 높은 절벽으로 가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는 이상한 벌레. 우리 아버지의 생애는 부판의 그것과 너무나 닮은 것 같아.”
신기한 벌레네. 근데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게 그 벌레뿐이겠니?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사가 다 그렇지. 네 아버지를 포함해서.”
하긴..... 그렇긴 해.”
백에서 콤팩트를 꺼낸 영미가 정아에게 내밀면서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정아가 대답했다. 이제 고개 몇 개를 넘고 큰 다리를 건너면 금방이라고. 기남이 부연 설명을 했다.
아까보다 산이 높아지고 골이 깊잖아요. 이건 우리의 고향 정선이 가까워졌다는 방증입니다.”
정아는 눈에 익은 산야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방금 기남이 말한 우리들의 고향 정선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뇌리를 맴돌았다.
차는 쉬지 않고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달렸다. 길 왼편으로 길을 따라 흐르는 오대천이 나왔다. 이 천이 조양강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정선이었다. 오대천의 풍경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물살이 센 데다 곳곳에 깊은 소가 많아서 레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조차 무섬증을 낼 정도로 당당했던 옛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여느 산골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냇물 정도로 보였다.
오대천이 왜 저 모양이라니? 이제는 수영은커녕 발도 적시기가 어렵겠다.”
글쎄 말이다. 우리 학교 다닐 때 다이빙을 하며 놀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젠 그랬다간 바로 마빡이 까진다. 여기가 이리 말라버리니 저 아래 조양강도 바짝 쫄 수밖에. 마치 노인네들 마른 젖가슴을 보는 것 같지.”
어머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요즘 사우나 가보면 가슴이 가을 호박처럼 큰 노인네들이 얼마나 많은데.”
창문을 내리고 바깥 구경을 하고 있던 영미가 급히 문을 올리며 끼어들었다. 기남이 룸미러로 영미와 눈을 맞췄다.
그런가요? 제가 아직 여탕을 가보지 못해서 말이지요. 하하하....”
반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트럭의 행렬이 보였다. 대형 트럭 여섯 대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트럭에는 커다란 조경용 소나무들이 서너 그루씩 몸을 맞대고 드러누워 흔들렸다.
혹시 우리 엄마가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어?”
별말씀 없으셨는데. 그냥 이런 저런 안부를 나눈 것 외에는.”
기남이 고개를 저었다. 정아는 기남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만나 얘기를 시작해서는 늘 딸의 박복을 입에 올리는 습관이 있으니 말이다.
혹시, 영미 씨도 아이가 있나요?”
가남이 룸미러로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화들짝 놀란 영미가 기남의 뒤통수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참! 아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유분수지,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기남이 다시 룸미러를 쳐다보며 손을 내저었다.
, 쏘리, 쏘리! 근데 그 지역 남자들은 눈을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나 봐요. 이런 일등 신붓감을 내버려두다니.”
짚신도 다 짝이 있는 법이니까 기다리면 언젠가는 오겠지요. 뭐 안 오면 말고요.”
두 사람이 너스레를 떠는 사이 차는 조양강을 지나 아우라지역에서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기남이 대합실로 뛰어갔다. 기남의 머리 위로 봄볕이 쏟아졌다. 정아는 몸을 돌려 잠이든 은지를 깨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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