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 번째 이야기 무언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
Wo die Sprache aufhört, fängt die Musik an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독일 후기 낭만주의 소설가이자, 법률가, 작곡가, 음악 평론가, 삽화가, 풍자만화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에른스트 호프만은 ‘언어가 멈추는 그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글을 쓰고, 말로 누군가를 변호하고, 세상을 풍자하던 호프만에게는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언어란 많은 생각과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흔한 한마디 말조차 건네기 힘든 상황 앞에 놓일 때가 있다. 사랑을 고백하고, 위로를 건네고, 기쁨을 표현하고... 음악은 글로 표현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더 깊고, 더 섬세하게 담아내기도 한다. 언어가 멈춘 그 자리에, 노래하기 시작하는 음악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펠릭스 멘델스존 <무언가>
Felix Mendelsshon-Bartholdy <Lieder ohne Worte>
‘무언가(無言歌)’는 말 그대로 ‘말이 없는 노래’ 이다. 독일 낭만 시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1829년부터 1845년에 걸쳐 피아노곡으로 작곡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이름처럼 가사는 없지만, 가곡과 같이 선율이 분명하고, 시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 서사적 어조, 명확한 형식이 특징이다.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모두 49곡으로 48곡의 피아노 소품과,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1곡이 포함된다. 여섯 작품씩 묶어 총 8권의 작품집으로 발표되었다. 1-6권은 생전에 출판되었고, 7권과 8권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각각의 곡에 표제를 붙여 불리기도 했지만, 멘델스존이 직접 제목을 붙은 곡은 많지 않다. 사냥의 뿔피리를 떠올리게 하는 ‘사냥의 노래’와 ‘이중창’, 이탈리아 여행 시 베네치아 운하의 곤돌라를 보고 작곡한 ‘베네치아의 뱃노래’, 봄 햇살 아래 바람이 살랑거리는 듯 연주되는 ‘봄노래’, 물레를 돌리는 듯한 음형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물레의 노래’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시대를 살며 수많은 가곡을 작곡한 슈만은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듣고, “해질녘 피아노 앞에 앉아 무심히 건반을 누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악상을 흥얼거릴 때가 있다. 누구나 경험하는 평범한 일이지만, 멘델스존과 같이 재능 있는 이라면 단번에 <무언가>와 같은 예술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짧지만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슬픈 많은 이야기를 듣노라면,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넓은 세계가 더 구체적이고 더 선명하게 각자의 마음 안에서 펼쳐진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Sergei Rachmaninoff <Vocalise> op.34, no.14
멘델스존의 <무언가>가 기악으로 연주되는 가사가 없는 가곡이라면,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는 가사 없이 모음으로만 노래되는 성악곡이다. 1912년 작곡한 14개의 성악곡 중 마지막 작품이며 피아노 반주와 고음역의 성악가를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다. 아-, 이-, 우- 등 모음으로만 노래하며 아름다운 선율이 사람들을 매혹시키며 이후 다양한 악기 조합으로 편곡되었다.
느린 빠르기말 ‘Lentamente' 과 더불어 '매우 노래하듯 (Molto cantabile)'라는 지시어를 덧붙였다. 담담한 발걸음처럼 이어지는 8분음표 위에 애절한 선율이 얹어졌다. 러시아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우수에 젖은 멜로디는 금세 모든 공간을 애수 어린 감성으로 채운다.
가사가 없는 대신, 연주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각자의 사연을 담아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매력적인 곡이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 No.23 <Appassionata>
힘없이 떨군 고개, 축 처진 어깨. 악보를 들고 피아노 앞에 앉은 이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피아노 위에 얹어진 시들어가는 노란 장미와 뒤쪽으로 살짝 보이는 꽃이 만개한 나무의 대비는 연습 후 지친 여인의 모습과 잘 연주하고 싶은 마음속 열정의 대비 같기도 하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멋진 정장을 입고 뜨거운 조명 아래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하지만 빛나는 순간은 끝없는 초라함과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만나는 짧은 반짝임이다. 작은 지하 연습실에서 너덜너덜 해져가는 악보, 끝이 뭉떵한 몽당연필, 거뭇거뭇해진 지우개 똥들을 친구 삼아 길고 긴 시간을 보낸다. ‘나는 왜 늘 부족할까’ 하는 자괴감과 ‘앞으로도 세상에 남아 몇 백년 연주되어질 대곡을 망치지는 않을까’ 쪼그라드는 마음과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작곡자가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늘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고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의 힘겨움을 담은 그림은 아닐까?
이 그림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 연주를 막 끝낸 피아니스트를 그렸다.
베토벤의 중기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발트슈타인>, <고별>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1악장과 3악장은 타오르는 불꽃같이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담았고, 2악장은 엄숙하게 정적으로 흘러간다. '열정(Appassionata)'이란 부제는 베토벤 사후에 함부르크의 출판업자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크란츠가 붙였다. 작품이 너무 테크닉적으로도 어려워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편곡을 함께 출판하면서 붙인 ‘열정’ 이라는 부제가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삶 안에서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뇌, 투쟁, 화해, 사랑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맹렬히 질주하고 숨을 고르고 다시 휘몰아친다. 음표 하나하나에 수백마디 말보다 많은 감정을 담은 베토벤의 음악을 막 연주한 여인의 지친 뒷모습. 그 모습에서 치열하게 매일을 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본다. 때로 지치고, 때로 무너지지만 음악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 안의 열정은 내일 또 다른 음악을 노래할 것이다.
글로도 말로도 전하지 못하는 모든 마음을
음악 안에 가득 실어 보내며
음악 칼럼니스트 여명진 크리스티나
mchristinaye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