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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본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1989) 20세기의 클래식 음악을 논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질 수 없다. 성공과 상업...

by 유로저널  /  on Apr 22, 20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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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본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1989)

 20세기의 클래식 음악을 논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질 수 없다. 성공과 상업성에 치우친 그의 질주와 행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음악적 유산이 우리에게 위대한 양식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

 유명한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한 독일에서 그의 흔적은 여기저기 일상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방송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물론, 갤러리부터 시작 해서 백화점, 식당에서까지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사진)은 독일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스타로 인정 받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지휘할 때의 그는 한때 사진예술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 이었다고 한다.)

 1908년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의 잘쯔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그리스 출신이었으나 귀화하여 귀족칭호를 받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대에 진학했으나 적성에 맞이 않아 중도에 포기한 그는, 음악공부를 하여 피아니스트로서의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연주자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지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그의 스승인 베른하르트 (Bernhard Paumgartner)’는 카라얀에게 지휘 공부를 권유하게 되었고, 그는 빈에서 1927년에서 29년까지 지휘를 공부하며 그의 자질을 키우게 되었다.

그는 수업 과정에서 물론 여러 거장들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한스 크나퍼부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클레멘스 크라우스등과 같은 정통 독일계 지휘자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카라얀의 탁월한 독일음악의 독보성은 아마 이 때부터 쌓여진 그의 관심에서부터 발전한 것인 듯 싶다.

 빈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고향인 잘쯔부르크에서 데뷔 연주회를 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울름(Ulm)시립 극장의 지배인이 그를 스카우트하게 된다. 울름에서 20 대 초반에 연습 지휘자로 일을 한 그는 이 시기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가 이끄는 밀라노 스칼라좌의 공연을 듣게 되는데, 이때 공연한 토스카니니의 지휘는 카라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태리 출신인 토스카니니가 정통 독일 음악을 추구하던 카라얀에게 끼친 영향은, 후에 같은 음악적 스타일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지휘를 통해서 나타낼 수 있는 충격적인 음악의 재창조였던 것이었다.(카라얀은 일생동안 토스카니니에 대한 추모 공연 등으로 그 존경심을 나타냈으며 그가 1930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보기위해 거의 2키로 되는 바이로이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왕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울름의 계약이 끝나고 카라얀은 1935, 아헨의 음악감독이 되기 위해 나찌당에 입당한다.(-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이 사실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몇 개월 무직으로 있었던 그에게 아헨의 음악감독 되기 위한 나찌당의 입당은 필수적이었다는 것인데, 이미 그 전에 입당한 사실이 있다) 이 일은 독일의 패전이후,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취급되며 지속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었지만, 어쨌든 이 시기의 그는 나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27세의 나이로 독일내의 최연소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독일의 패전 후, 그는 이탈리아에서 감금된 채 지내며 한참 연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고생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EMI의 월터 레그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된다. 시대적 흐름에 있어서 음반시장이 갖는 무한한 잠재성을 내다본 그는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다시 지휘자로써 발 돋음 하게 되어 1948년 빈 필을 맡게 되었고, 1955년 베를린 필의 지휘를 맡고 있던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1886-1954 ; 카라얀의 적수로 전해지고 있는 그는 나찌당원으로 활동한 카라얀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카라얀이 평생 넘지 못한 벽이었다.) 의 죽음 이후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의 자리를 맡으며, 1989년까지 유럽 지휘자로써의 최고 권력을 누리며 세계 무대를 종횡무진 하게 된다.

 카라얀의 위대함은 곡들의 읽어냄에 있어서 탁월한 그의 통찰력에서 비롯된다.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곡들을 세련되게 다듬었으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정형화된 틀 안에 오케스트라와 음악가들을 일관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솔리스트가 부각되는 협주곡의 녹음에 있어서 다소 인색함을 보였는데, 이것은 전체적인 하모니를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일면을 보여준다. 교향곡에 있어서 그의 명 작품은 베토벤의 교향곡들, 브람스의 1번 교향곡,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이라고 평가되어지는데,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에 있어서는 그에 버금가는 지휘자가 없다는 평이 압도적이다. 오페라 지휘자로써의 그는 바그너의 작품에서 예외적으로 선배 지휘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강한 개성을 나타냈는데, 이것은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바그너의 음악을 재창조했다는 의미로 그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와는 다른 업적을 남긴 명 지휘자로 구별되어 평가되어진다.

 1989 년 빈 필과 함께한 미국공연을 마지막으로 잘쯔부르크에서 행해지는 베르디의 오페라가면 무도회를 준비하며, 세계를 휩쓸었던 지휘자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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