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3)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Dec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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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3) -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은지를 앞세우고 자동문 안으로 막 들어선 정아는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툭 건드리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여자는 청색 투피스 차림에 알이 크고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시선을 비껴내며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래나. 멋쟁이 처음 봤어?"

여자를 쳐다보던 정아가 픽 웃음을 흘리며 투덜거렸다. 

"깜짝이야! 난 또 웬 촌닭이 시비를 거나했네."

저만치 가다 뒤를 돌아본 은지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영미는 은지를 번쩍 들어서 품에 안았다. 

"우리 은지 새 옷 입었네. 아주 예쁘다. 이모는 어때?"  

"멋져요! 지금 테레비에서 막 달려 나온 효리언니 같아요!"

은지의 조잘거림에 영미가 탄성을 지르며 볼을 비벼댔다. 

"그렇지? 역시 우리 은지 눈은 보통이 아니라니까. 나를 컨츄리꼬꼬로 보는 엄마와는 차원이 달라."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난 영미가 정아를 바라보며 턱짓으로 바깥 도로 저편을 가리켰다. 

"근데 아까 그 사람 미친개 아니었어?"정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봤구나? 버스 기다리다 엉겁결에 얻어 탔어. 정말 우연히."

영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연이라. 근데 왜 이렇게 일보고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뒤끝이 깔끔하지가 않지? 혹시 그간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진척이 있는 거 아냐?"

추궁이 계속되자 정아가 눈을 흘겼다.  

"또 생사람 잡는다. 잠수 타는 채무자 잡으러 공항으로 가다가 태워준 거라니까."

색안경을 벗어 머리 위로 걸친 영미가 고개를 모르 틀어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정아는 무시하며 영미의 짧은 치마에 눈길을 보냈다.

"못 보던 옷인데?"

"어제 저녁에 백화점에 급하게 다녀왔지. 어때, 죽이지?"

"예쁘기는 하다만 혹시 우리 고향 사람들이 읍내 다방 새 아가씨인 줄 알까봐 걱정된다."

뒤태를 점검하며 몸을 당싯거리던 영미가 도망치려는 정아의 등짝을 찰싹 갈겼다. 티격 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은지가 까르르 웃었다.

세 사람은 좌석 배정을 받고 짐을 부친 뒤, 곧바로 출발 게이트로 향했다. 정아는 신분증을 꺼내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개가 주변 어딘가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채무자를 찾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정아는 부디 미친개에게 쫓기는 채무자가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비행기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높아지자 정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발밑이 텅 비는 느낌에 오금이 저렸다. 은지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정아를 쳐다보았다. 비행기가 한 차례 출렁거리자 일시에 절제된 비명이 새났다. 가파르게 솟구치던 비행기가 마침내 평행을 유지했다. 안내 방송이 나왔고 여기저기서 안전벨트를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아도 벨트를 풀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 사이 영미가 정아의 자리로 옮겨 앉아있었다.   

"참 쫀쫀하다. 기왕에 만드는 거 창문을 좀 큼지막하게 만들어서 구경을 제대로 하게 해야지."

영미가 창을 가리키며 구시렁거렸다.

"와, 밑에 구름 이불이 가득해요!"

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밖을 내다보던 은지가 탄성을 질렀다. 세 사람의 머리가 동시에 창으로 몰렸다. 

"어머, 웬일이야. 저걸로 이불을 지으면 전 세계 사람이 다 덮고도 남겠다, 그치. 영미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에 온통 새하얀 뭉게구름으로 가득했다.    

"저 위로 뛰어내리고 싶지 않니?"

이번에는 정아가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영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정아를 노려보았다. 

"누굴 짱구로 아나? 뛰어내리는 순간 버스에 깔린 개구리 신세가 되는 거잖아."

영미의 개구리 흉내가 더해진 너스레에 앞좌석에 앉은 새치머리가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정아는 몸을 의자에 깊숙이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자신도 언젠가 저 구름이 아늑한 이불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오면서 처음 타 본 비행기. 그 비행기 안에서 본 뭉게구름의 향연. 그때 친구들 모두 탄성을 지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승무원이 문을 열어준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맞잡고 구름 위로 뛰어내릴 기세였던 것이다. 들떠서 너무 떠들었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가 항문을 여는 것만 봐도 까르르 자지러지는 시기여서 그랬을까, 결국 승무원이 한차례 자제 방송을 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착륙해서 섬에서 보낸 나흘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강렬한 바다였고 이국적인 풍경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정아는 고향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버리고 이 섬의 대학을 선택했다. 담임선생님과 집에서는 가까운 대학 놔두고 뭐 하러 그 멀리까지 가서 고생을 하려느냐고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처럼 수학여행의 기억은 정아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바꿔 말하면, 뒤틀려 터덕거리는 지금의 삶은 바로 그 수학여행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때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마쳤더라면 어떤 모양의 삶이 진행되었을까. 그랬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윤택하고 존중 받는 삶을 꾸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이란 가정 자체가 부질없는 괴물이니까.  

"벌써 내리는 거야. 기내식도 안 주고?"

안전벨트를 차라는 안내가 나오자 영미가 또 투덜거렸다. 

"떴다가 바로 내리는데 무슨 밥을 주니. 주스도 감지덕지지."

"밥은 안 줘도 좋으니까 어디든 좀 더 날아다니다 내렸으면 좋겠는데. 기장한테 내가 부탁해볼까?"

영미의 수다는 비행기에서 내려 청사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캐리어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정아는 그때마다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정선까지는 어떻게 가는 거니? 기왕이면 택시로 가자. 나 돈 많아."

"일단 택시로 원주터미널까지 가서 버스로 갈아 탈 거야."

"버스에서 내리면 집까지는 가까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집까지는 다시 택시를 타야 할 것 같다. 하루에 세 차례 뿐인 버스를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아는 여기서부터는 내 구역이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라고 일단 큰소리를 쳤다. 캐리어를 찾은 다음 나란히 출구로 걸어 나왔다. 마침내 고향에 왔다는 안도감과 설렘 때문일까. 정아의 볼이 발개졌다. 

출구를 막 통과하던 정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체구가 사뭇 당당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와 정아 앞에 멈춰 서더니 손을 덥석 잡아 흔들었다. 정아는 반걸음 물러섰다.   

"어서와, 여전하네!"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사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 모르겠나?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 그때 정아의 뇌리에서 뭔가가 반짝 빛을 냈다. 사내의 표정에서 모아진 자음과 모음이 입안에서 굴렀다. 몇 바퀴 구르던 그것들이 급하게 조합을 이루더니 다급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머, 혹시 기남이?"

이번에는 정아가 사내의 손을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영미와 은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멀뚱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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