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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9.09 23:05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79)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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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낮달의 시간

 

탈의를 하고 탕으로 들어선 정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쏠렸던 눈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아의 전신을 훑고는 이내 흩어졌다. 대각선 구석에서 영미가 손을 들었다.

“아유, 가시나 얼굴에 광나는 것 좀 봐. 눈이 다 부시네! 누가 이렇게 다림질을 매끈하게 해 준 거야?”

영미가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내밀며 엉너리를 쳤다.

“일어나서 눈곱만 떼고 달려왔는데 뭔 소리야.”

의자를 당겨 앉으며 정아가 눈을 흘겼다.

“아니야, 내 눈은 못 속여. 간밤에 뭔가 특별하게 사랑을 받은 흔적이 역력해.”

“기집애,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정아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뭐 어떠니, 여긴 다들 우리 가족들뿐인데.”

말마따나 정말 눈에 익은 얼굴이 여럿 보였다.

“사람 몸이라는 게 참 신비하단 말이야. 나나 너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겉으로 봐서는 전혀 몰라. 그냥 그대로지.”

“더 시끄럽게 굴면 나 저쪽으로 간다.”

정아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제동을 걸었다.

“갈 테면 가라. 가면 거기서도 들리게 크게 말하면 되지.”

영미의 넉살에 정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물소리 때문에 영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알 리 없지만 그래도 정아는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물을 끼얹고 비누칠을 시작하니 아래가 싸하니 아렸다. 정아는 비누칠을 멈추고 바로 물을 뿌렸다. 문득 연회장에서 본 쇼타 상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떠올랐다. 단발에 가까운 긴 머리칼에 깡마른 체구를 가진 그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했을 때 오늘밤은 그다지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도했었다. 순한 인상인데다 근육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체형이어서 집요하게 괴롭힐 힘도 열정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커다란 착각이었는지 호텔에 들어가서 바로 알아차렸다. 참 특이한 몸이었다. 그가 욕실로 가게 위해 속옷을 벗는 순간 정아는 혹시 지금 자신이 사람의 하체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경주마의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성기는 터무니없이 길고 굵고 검었다.

“네 말이 맞았어. 마른 장작이 화력이 좋다는 거.”

정아가 영미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어제 선물 사준 손님 말이니?”정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거 봐, 내가 잘 봤지. 어쩐지 네 얼굴이 반짝 거리더라니까. 그가 너를 안고 훨훨 날아다니다가 홍콩쯤에서 떨어트린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고, 아무튼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 정도였어? 선물 안겨주고 아주 본전을 뽑아간 모양이구나.”

“나 오늘 일 할 수 있을지 몰라. 많이 쓰라려.”

영미가 정아의 다리를 벌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오늘은 컨디션 별루야. 밤에 무리를 했거든.”

샤워볼에 비누 거품을 먹이며 영미가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밤에? 넌 어제 쉬었잖아. 집안 대청소라도 한 거야?”

“야, 나는 쉬는 날 맨날 청소나 해야 되니? 나도 오랜 만에 몸 좀 풀고 신나게 즐겼다니까.”

영미가 샤워볼로 정아의 등을 밀기 시작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혹시 너 또 호스트빠에 간 거야?”

“얘 봐,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나도 이젠 능력 있는 여자야. 그렇게 돈 뿌리며 연애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인맥은 있다고. 그리고 그런 비린내 나는 기생오라비 같은 애들에게 빨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

정아가 엄지를 척, 올렸다. 거품 위로 물을 끼얹으며 영미가 말을 이었다.

“넌 내가 간밤에 누구랑 썸씽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러게 나도 지금 그 생각하고 있었어. 우리 영미를 못살게 군 남자가 누굴까 하고. 짚이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로바다야끼 오빠?”

“딩동댕! 맞았어. 어제는 내가 꼬리를 쳐서 제대로 잡아먹었지. 문제는 지금 내 몸 안에서 발발한 새로운 임진왜란이야. 이게 내가 작정하고 부러 일으킨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거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정아가 보조의자를 끌어서 영미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사실 요즘 내 자궁이 수상해. 이달에도 생리가 없어서 키트로 확인을 했는데 안 좋은 결과가 나왔어.”

화들짝 놀란 정아가 영미의 아랫배를 만졌다.

“그래서 심하게 섹스를 하면 간혹 애가 절로 떨어지는 수가 있다고 해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철 오빠를 유혹한 거지. 전에 어떤 선배도 그렇게 해결한 적이 있다고 했어.”

정아가 샤워볼을 넘겨받아 영미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미가 바구니에서 우유팩을 꺼내 주둥이를 열었다. 우유를 손바닥에 따라 제 몸에 먼저 바른 다음 정아에게도 권했다.

“여기에 누구 씨가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혹시 그 오빠?”

영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았겠니. 슬프게도 오빠는 씨 없는 수박이야.”

“시술을 받은 모양이구나. 근데 간밤 처방이 효과가 있을까? 없으면 어떡할래?”

“어쩌긴, 도움을 받아야지. 경진이 이모라고 있어. 간호조무사 출신이지만 솜씨가 좋아. 우리 우림각에서 벌어지는 이런 사고를 아주 은밀하고 깔끔하게 처리해주는 분이시지.”

마치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영미의 얼굴을 정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새로 들어온 아가씨가 옆에 자리를 잡으며 아는 체를 했다. 우유를 바른 두 사람을 두고 언니들은 역시 차원이 다른 피부 관리를 한다고 추켜세웠다. 영미가 빈 우유팩을 들어 보이며 날짜가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 잔하겠느냐고 농을 걸었다. 덕분에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졌다.

영미가 턱짓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지금 껌 씹고 들어오는 년 보이지.”정아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거 아주 밥맛이다. 금주라는 년인데. 저년 오늘 출근하려는 모양이야.”

“목소리 좀 낮춰라. 옆에서 듣겠다.”

“괜찮아. 다른 애들도 다 나와 같은 심정이니까.”

정아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손님 중에 후쿠다 라는 남자가 있었어. 나이도 지긋하고 매너도 좋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지. 나도 모신 적이 있는데 사랑을 딱 한 번만 하고 일찍 보내주면서도 팁을 예술로 주더라. 그는 순영이 단골이 되었어. 근데 글쎄 저년이 언제 일을 꾸몄는지 감쪽같이 가로채서는 떡하니 현지처가 된 거야. 순영이가 애써 밥상을 차려 놓았는데 저년이 숟가락만 가지고 만찬이 차려진 밥상을 차지해버린 것이지.”

“저런! 그러니까 제2의 뻐꾸기구나. 예전에 보건소에서 만난 그 뻐꾸기 말이야.”

“역시 우리 정아는 머리가 좋아.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친다니까. 그래서 쟤 별명이 뻐꾸기 투지!”

“순영이라는 얘가 안 됐구나.”

“완전 똥 밟은 거지 뭐. 걘 지금 일 여기일 그만두고 단란주점으로 옮겨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탬버린을 치고 있지. 반면에 금주 저년은 지금 온갖 호사는 다 누리고 살아. 후쿠다가 아파트 사줬지. 다달이 생활비 보내오지. 그런데도 심심하면 저렇게 껌 짝짝 씹으며 출근해서 아가씨들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는다니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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