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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나이 사이 (독일 손병원님 기고)

by 편집부 posted Nov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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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나이 사이

독일 교민 1세대인 파 독 광부나 간호사들은 거의 칠순이 넘은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그 푸르던 젊음은 가고 세월 따라 나이가 된다. 나이를 먹는 게 서글프기도 하지만 나이를 더 먹을수록 해쳐나가야 할 것들을 극복 하는 게 더 버거울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 함은 앞날은 줄어가고 과거는 길어져 가는 것이다. 노년에 들면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지인들을 만나면 옛날얘기나 자기 경험담이 반복되어 따분하고 지루하기일 수이다. 

남자는 자기가 느낄 만큼 늙지만 여자는 남에게 그렇게 보일 만큼 나이를 먹는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 그러나 노년은 삶의 일부이기에 그리 서운해 할 일도 아니며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한창 시절부터의 시작에 따라 삶의 격이 달라진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애써 태연하다. 꼭 데기에서 많이 기울어져 피사의 사탑이다. 그러니까 나이에 맞춰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일이 밀려지면 첫 줄 못 푼 수학문제처럼 갈수록 힘들어지고 부담이 된다. 
여기에 공자는 멋지게 나이를 정리했다.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어 지학(志學)이요 서른에 이루었으니 불입이요 마흔에 생각이 흐드러지지 않으니 불혹(不惑)이요 쉰에 지천명(知天命)을 알았고 여순 (耳順)에 귀로 들으니 그 뜻을 알았으며 일흔 (古希)에 이르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두보가 조정의 혼란스러움을 한탄하며 47세때 지은 곡강(曲江)에서 고래희(古來希)가 나오는데 후세사람들은 줄여서 고희(古希)라 한다. 인생 70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 쓴 용어이다. 

나이 별 이름에서 확실히 알아둘 것이 여러 개 있다. 과년(瓜年)은 16세 여자인데 노처녀와 비슷한 의미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의 개념으로는 혼인하기 적당한 나이라고 해서 과년이다. 약관(弱冠)은 20세 남자이며 방년(芳年)은 꽃다운 여자나이 20세이다. 
촌놈은 나이가 계급이지만 나잇값을 못하면 손가락질 당한다. 사회에서 나이 덕은 겨우 경로우대 석이나 입장 할인료 정도이다. 뉴질랜드에서는 나이 75세가 되면 운전면허증이 자동 말소된다. 
노인은 게으르고 처진 느낌이고 어르신은 부지런하고 단정한 이미지이니 어르신으로 불리도록 살아야 한다. 어른 어르신은 존경 받는 말이다. 귀를 먼저 열고 말은 나중에 해야 할 나이이다. 혼자 떠들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 나도 힘든데 헛소리 들어줄 사람이 있겠나. 
치매(痴呆)의 치나 매는 어리석다는 뜻인데 왜 등신으로 부르냐? 뇌 질환으로 인한 인지기능 상실로 생긴 병이니 다른 말로 대치되어야 한다. 
볼펜 하나로 A 4 용지를 앞 뒤 뛰어 쓰기 없이 빼곡히 쓰면 13장을 쓸 수 있다. 광고용 볼펜이라면 10장 정도이다. 까만 잉크나 파란 잉크가 아닌 색깔 잉크로는 6장 정도 쓴다. 

나는 일주일 평균 하나씩 사용해서 은퇴 후 여태껏 300 여 개의 볼펜을 썼다.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누가 건네준 볼펜도 몇 자 써보면 남은 양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잉크냄새로도 아직 얼마 더 사용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쓰여지는 글자 크기에서도 잉크 양을 알 수 있다. 볼펜 300 여 개를 쓴 A 4용지의 높이는 꾹 눌러서 23 cm 정도 된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나이, 안 먹을 수 없는 나이에 밀리지 않기 위해 이런 저런 공부를 한다. 이길 수는 없어도 견딜 수 있는 나이를 지키자. 피할 수는 없어도 맞설 수 있는 나이를 갖자. 힘든 세월을 막을 수는 없어도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우자. 
또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주먹을 펴는 것이다. 욕심을 버려야 편안히 늙을 수 있다. 흰 손으로 검은 마음은 짓는 것은 노 추이다. 할 일 다하고 죽은 무덤은 없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기타 줄을 팽팽히 조여놓으면 마침내 늘어져 제 소리를 못 낸다. 사용치 않을 때에는 풀어놓아야 한다. 쉼도 삶에서 보약이다. 쉼은 놓는 것이다. 마음의 대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자기를 돌이켜 보는 시간도 매우 중요하다. 어느 누가 절대 종교를 믿는다 치자. 현실에서 못 된 짓을 일삼으며 살다가 어느 절대자를 믿었다고 천국 극락에 갈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서도 인정 받지 못한 인간이 절대자를 믿었기에 천국 극락이라면 말이 되나. 항상 착하고 올바르게 살던 사람이 죽었어도 그가 무 종교인이어서 지옥에 간다면 그 또한 해괴한 일이다. 
관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야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느 종교를 믿기에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면 종교를 빙자한 제 욕심 채우자는 심보이다.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어도 등불 하나 켤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나의 인생철학의 으뜸은 화엄경의 핵심인 일체유심 조이다. 
어느 일류 요리사가 오만 음식을 다 만들어도 내 입맛에 안 맞으면 일류가 아니다. 어느 축구팀이 매 경기마다 승리한다고 그 팀의 팬이 될 필요는 없다. 풀잎에 맺은 이슬방울에서 우주를 보았다면 깨달은 자이다. 부단한 공부와 자기 견성으로 내가 만드는 세상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무신론자는 신성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가 따를 절대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살다간 자리가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된다면 그는 선각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성인으로 추앙 받아 인류와 세상을 화평케 한다면 그가 책 속의 그 절대자들보다 훨씬 거룩한 분이라 여긴다. 
이 땅에선 사람이 할 일과 도리가 있다. 진 인사 대천명 이다. 날아오를 수는 없어도 날아 올릴 수 있는 인간의 꿈이 중요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정점이자 프랑스 모럴리스트 문학의 원류였던 몽테뉴는 광신적 종교전쟁이 한창일 때 인간 본성을 통찰하기 위해 밖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 본다. 
우리가 자신을 알 수 없다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천사가 되려다 짐승이 된다는 이유로 그의 저서 레세제 (que sais je)는 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오른다. 18세기에 볼테르가 등장하기 전 모든 지적 권위에 맞서 싸왔던 몽테뉴는 프랑스혁명의 선구자였다. 레세제는 회의주의적 사색의 이정표였다. 
그러나 그 책은 놀랍게도 탈 근대적인 덕목들을 빚어낸다. 타자의 포용, 다름의 가치, 다양성의 존중, 열림의 정신과 실천, 문화적 상대주의 등등. 평생 자기 자신과의 우정을 버리지 않았던 그의 자화상은 인류의 자화상으로 확대된다. 인간인 것, 이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생트뵈브) 피타고라스의 며느리는 말했다. "여자가 남자와 잘 때 옷과 함께 부끄러움도 벗어야 한다. 그리고 옷을 입을 때 부끄러움도 다시 입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의 말이다. 종교적인 진리보다 속담이나 격언이 일상에서 더 와 닿는다. 속담이나 격언은 인간들이 합쳐 만들어내는 진리이다. 누구나 늙어지면 어제 보고 오늘 만난 노인들 모습으로 변한다. 육상트랙을 왼쪽으로 돌기. 스피드 스케이팅 자전거 속도경기 
또한. 자전거의 손잡이 지름이 세계 동일하다. 여자들 브래지어 끈 너비와 차량 안전벨트의 너비가 동일하다. 종교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이렇게 보편적 기준에 맞춰 어울려 산다. 
의학계에서는 누구나 건강하면 120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한다. 일찍이 120세를 하늘이 준 수명이라 하여 천수(天壽)라 했던 선조들이다. 쇠도 삭는데 70% 정도의 물로 인생 100 여 년을 인체 설계한 조물주께 감탄한다. 
재물 명예 출세 벼슬에 몰입해도 100 여 년으로 적당하다. 건강하드라도 할 일없이 의욕 없이 늙어 120 살 채울 일도 아니다. 장수가 마냥 축복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수를 못 누린다 해도 훗날 내 뜻과 발자취가 남아있으면 자랑스런 조상님이라 후손들로부터 술 한 잔 더 얻어 마실 수 있지 않겠나. 
하루 해가 저물어갈 때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 그런 모습으로 천수를 누린다면 떠나는 사람이나 남은 사람이나 그 경계에 슬퍼할 일이 덜어지겠다. 

2018.11월 초하루에 쓰는 글.

손병원 기고
woniker@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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