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우산도 주민 86명이라고 기록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큰 대나무ㆍ물소 가죽ㆍ생모시ㆍ목화씨ㆍ향나무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가구수[戶]는 15호요, 인구는 남녀를 합하여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위는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1417년) 2월 5일 기록으로 그때 우산도(于山島)로 불렀던 독도 이야기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풍 관련 기록이 약 177건 정도 나오며, 특히 명종 때 가장 많은 29번의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도 독도에 가려면 바다가 허락해야 한다고 하는데 큰배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재) 독도재단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가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킴으로써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나오는 '우산국'은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성종 때에는 독도가 세 개의 봉우리로 되었다 하여 ‘삼봉도(三峰島’)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고, 정조 때에는 강치 곧 “가지어(可支漁)가 놀라 뛰어나왔다"라고 하여 ‘가지도(可支島)’라고도 불렀고, 고종 때 ‘석도(石島)’란 말도 나왔다고 한다.
이 석도(石島)를 우리말로 표현하여 '돌섬'이 되고, '돌'을 사투리로 '독'이라고 하여 울릉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섬'이라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독도(獨島)'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독도는 신라 때부터 우리의 땅이었음이 역사적으로 분명하다.
(글: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공 )
한국 유로저널 노영애 선임기자 yanoh@theeuro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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