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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체
2026.05.08 01:39
짜빈동 전투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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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빈동 전투의 회상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1964년 9월11일을 기점으로 하여 주 월 한국군 사령부가 1973년 6월 30일 해체되었다. (대구 광역시에서 제3 야전군으로 재편성되면서 해체됨) 1차 파병은 죤슨 미 대통령의 요청으로 1964년 9월 제 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으로 구성됐다. 2차 파병은 1965년 3월 비둘기부대원 2,000명은 건설지원단으로 대민업무를 지원했다. 주 월 한국군 사령부는 서울 필동에서 1965년 9월 25일 군단규모로 창설되었다. 예하부대로는 맹호부대 – 수도사단 소속으로 1965년 10월 파병. 백마부대 – 보병 제 9사단 소속으로 1966년 8월 파병. 청룡부대 – 해병대의 전투경험을 갖기 위해 파병은 필연이라는 주장을 펼친 해병대 사령관 출신인 김성은 국방장관의 건의에 의해 1965년 9월 20일 파병되었다. 모든 참전용사들은 부산 제 3부두에서 4차례에 걸쳐 장도에 올랐다. 참전용사들의 환송식에는 온 식구들이 배웅했다. 음식을 싼 보따리를 풀면서 어머니는 목 멘 소리로 자식에게 당부한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니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에 주위를 경계하는 헌병이 이를 듣고 가슴이 미어졌다. 6.25를 겪고 10여년을 지나 아들을 타국의 전쟁터로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절절이 베어 나온 말이다. 수송선이 수평선을 넘어 점이 될 때까지 가족들은 망부석처럼 자리에 박힌 듯 서서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부산에서 퀴논 까지는 5일간 거리였다. 백구, 은마를 합쳐 수송전대라 불렀다. 백구부대 – 해군 수송전부대는 LST – 812 함을 주축으로 보급물자 병력이동 임무를 수행했다. 은마부대 – 공군지원단으로 보급품수송 전사자 부상병 이송이 주 임무였다. 작전 한번 끝나면 냉방 시설 없는 기내를 선풍기로 견디어 온몸이 땀투성이로 파김치가 됐다. C 46D 기체가 노후하여 작전수행에 차질을 빚자 미군으로부터 C 54D 두대를 인수했다. 공군 현역시절 내가 근무한 바로 앞 구역은 외래 항공기들의 계류장으로 수많은 출입자들을 지켜봤다. 부상병들을 이송하는 항공기는 항상 야간에 입항했는데 2군 사령부의 구급차에 옮겨지는 모습은 매우 가슴 아팠다. (해병대 부상병들은 서울 대방동 해군병원에 입원했다). 미군 그린베레 용사들은 근무지 휴게실을 가끔 이용했다. 영어가 어느 정도 가능해서 병장계급으로 내가 바쁜 날이 많았다. 해서 별칭이 손 장군이었다. 군수지원부대로는 십자성이 있었다. 1966년 6월1일 수도사단으로부터 제 100공수사령부의 십자성부대를 이전 받았다. 군사정보대 통신보안대 민사심리중대가 배속되었다. 한국군의 주 전장은 후방에서 게릴라토벌과 대민봉사가 주 임무였다. 파병 초기에는 한국군들이 전술지역에서 방어와 대민봉사를 했는데 미군은 왜 싸우지 않고 부대만 지키냐며 질책했다. 한국군은 탐색 격멸할 여건이 부족했고 그럴 필요성도 없었다. 해병대 제2사단 13 대대 11 중대 3 소대는 전사에 남을 혁혁한 승리를 이룩했으니 짜빈동 전투이다. 짜빈동은 당시 해병이 붙인 지명 이름으로 월남어로는 그 지역은 꽝녓이다. 진지구축은 구릉지대에 길이 300m 폭 200 m 높이 30m의 타원형이었다. 이중 참호 외곽에는 철조망이 겹겹으로 둘러 처졌으며 네이팜 탄 조명 지뢰 38발 크레모아 63발로 무장했고 3개 소총소대와 1개 화기소대로 구성됐는데 3소대는 전술 부대였기에 90여명의 파견병력들도 당연히 전투에 참여하여 총 병력 294명이었다. 부대원들은 M 1 소총 BAR 자동소총 M1919 경 기관총 박격포 무반 동 총 등으로 무장했다. (M 16은 이 전투의 대승으로 1967년 후반기부터 지급이 빨리 됨) 예상침투 지역에는 지뢰 140발을 불규칙하게 깔았다. 참호를 팔 때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10cm를 더 깊이 파라는 이유는 1cm 더 파면 수명이 1%씩 늘어난다며 참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통로는 (또는 교통호라 불림) 서로 연결되며 중간중간에 토끼 굴이라고 엄폐 공간이 있다. 부대위치는 추라이 공군기지와 해병 포병대대를 지키는 길목이어서 언제라도 큰 전투가 발생할 소지가 많았다. 중대 간의 거리는 약 10km이며 그 사이를 야간 매복조와 수색대가 활동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한달 전 1967년 1월10일 짜민박 전투는 이동중인 해병들이 월맹 2사단의 매복 기습에서 밀려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3 소대원들의 전방경계 청음초는 적들의 수색조들을 탐지했는데 그 예리함은 베트남인 특유의 체취까지 포착했다. 청음초 란 야간 투시경이 없던 시절 적의 접근을 소리로 듣고 확인하는 초소 근무자를 말한다. 전투 삼 사일전부터 주민들이 어디론 가 슬슬 빠지는 걸 느끼고 전투가 임박함을 예측했다. 1967년 2월 14일 드디어 제 11 중대원들은 월맹 제 2사단 1연대 병력 약 2,400여명의 월맹 정규군과의 처절한 전투가 새벽 4시10분 부터 시작되어 콩 볶듯 하는 총소리와 작렬하는 포탄의 섬광이 번득이는 가운데 생사를 오갔다. 적들은 날씨가 나쁠 때 야음을 틈타 공격을 일삼는다. 백병전에 대비하여 놈들이 피아를 쉽게 구별 못하도록 위장복을 입었거나 전투모와 상의에 비표를 달고 있다면 지체 없이 사살하라는 중대장의 명령이 커졌다. 진지 앞 둔덕에서 수풀사이에서 침투하는 적들의 움직임이 커지자 조명탄을 터트려 상황을 파악하자 말자 적들의 집중 공격이 시작되었다. AK 47로 무장한 적들이 예상 침투로 인 3소대로 집중공격하자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가 포격을 개시하여 적들의 예봉을 꺾어 놓았지만 월맹의 특공조가 파괴통으로 3소대쪽 철책을 기여이 뚫고 밀려왔다. (파괴통이란 철책안으로 폭발물을 던져놓고 터트리는 길다란 파이프모양이다) M- 1 게런드 소총은 반 자동으로 8발을 발사한 뒤 탄알 클립을 매번 바꿔 끼워야 한다. AK-47은 실탄 30발을 장전하는 자동소총이다. 밤 이슬을 맞으면 놀쇠가 녹이 슬어 작동이 잘 안되는 M -1으로 싸운 해병대원들의 전투력과 불굴정신은 과히 압권이었다. 사격 속도가 느려 갑자기 들이닥친 적들과는 야전 삽이나 돌을 들고 싸웠다. 일부 부대원들은 M 16을 소지했다. 1소대의 방어선도 점차 위태해졌으나 적들이 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크레모아를 격발하니 반 경 100m 이내의 적들이 섬멸되었다. 1 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바위 뒤에서 RPG -2로 로켓탄을 발사하는 적 진지에 4인조 특공대를 인솔하고 수류탄으로 적을 무찌른 후 무기를 노획하고 소대로 돌아오는 도중 대전차 유탄포와 로켓탄으로 1 소대를 향하여 공격하는 적 8명을 제압하여 이진병장은 충무훈장 김용길 중사는 을지를 받았다. 1소대 앞으로 화염방사기를 든 사수가 다가오자 이중재 하사가 득달같이 뛰어나가 적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갈겼다. 제3소대가 뚫리자 백병전이 펼쳐져 교통로는 피바다가 됐다. 오가는 공방 끝에 여명이 밝아오니 월맹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며 퇴각준비를 했으나 기지내 침투한 10명의 적들은 육박전으로 소탕했다. 드디어 7시20분 경 전투가 끝났다. 진지내에는 약 500여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아군이 쏜 소총탄은 약 7만 발이었다. 전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과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확인된 시체가 243명이지 중 포화기로 분해되다시피 한 시체들이나 헬기 공격에 의해 죽은 자들을 포함하면 엄청 많았다. 진지 수습에 들어간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수한 파리떼가 시신을 뒤덮고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 김연상 여단장이 헬기로 제 일 먼저 부대를 방문하여 전공을 치하했다. (청룡부대 사령관은 이봉출 김연상 이동호 이동룡 허홍) 미군 교과서에 실린 짜빈동 전투였다. 노획된 월맹군의 문서에 의하면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피하라는 지침이 있었다. 이는 사이공 포스트 뉴욕 타임즈의 기사로 알려졌다. 격전지를 돌아본 미군 장교는 이곳은 지옥을 이겨낸 자리라 경탄했다. 짜빈동 전투는 미군 교과서에 실렸다.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그 당시의 전투상황을 상세하게 재현해 놓았다. 정 대위와 신 소위에게는 태극무공훈장을 을지무공훈장은 2명 충무무공훈장은 8명에게 수여되고 191명 사병전원은 각 1계급 특진이 있었다. 11중대는 박 대통령 표창과 존슨 미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받았다. 태국무공훈장은 살아서는 받을 수 없다는 최고 무공훈장이다. 전쟁이 한참 치열한 시기에는 해병179기 거의가 파병되었다. 236기는 파병 마지막 기수였다. 특히 복무 중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어 해군으로 통합되면서 해군 제대증을 받았다. 월남전에서 청룡 소대장들이 많이 전사하자 소대장 교육과정 6개월을 3개월로 단축시켜 긴급히 투입하였다. 청룡은 1965년부터 6년 5개월간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신소위는 부하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훈련이나 전투에서 항상 앞장섰다. 결혼을 한지 얼마 안되어 1970년에 또 한번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 계급이 내 마지막 계급장으로 여기고 용맹성을 발휘했다. 군인은 국가에 충성하지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다. 군인은 진급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군인의 사명을 다 한다고 강조하는 참 군인의 표상이었다. 1973년 이병문 대장이 포항 해병사단에서 해병대 해체를 선언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신원배 소령은 그를 죽이겠다고 연병장을 뛰쳐나갔다. 프랑크프르트에 사는 지씨는 해병 수색대출신이다. 신 대위가 부대 중대장 시절 모진 훈련을 함께했는데 - 한 밤중에 느닷없이 내무반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전쟁은 언제 터질지 모른다. 너희들은 완전 군장하고 나를 따르라” 스스로 부대 깃발을 들고 앞장서 구보하다가 강물 흐르는 다리위를 먼저 뛰어내렸다. 그에 대한 일화는 무협지 급이다. 해병대 초대 사령관 신현준 장군은 그의 아버지이다. 전사자들 가운데 이학현 상병- 오른쪽 발목이 관통 당한 후 전투에 임하기 어려워지자 총기를 도성룡 일병에게 넘기고 교통로에 들어온 적 5명을 유인한 후 수류탄으로 장렬히 전사. 해병대 교육 훈련단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린 이학현 관이 운영된다. 송영섭 일병 – 기관총사수 김남섭 병장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사격하다가 적탄 6발을 맞고 움직이기 힘들 자 기관총 총열을 뽑아 풀숲에 버리고 수류탄을 양손에 까 들고 죽은 척했다가 5명의 적들이 자신의 몸을 대는 순간 자폭용 수류탄으로 함께 자폭했다. 중대원들의 전사자는 15명 부상자 33명이다. 8년 8개월간의 참전기간동안 한국군은 상시적으로 5만여명의 병력을 유지하여 총 30만여명이 전공을 세웠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은 전사 5,099명 부상자 1만여명이며 청룡부대는 참전군인 37,340 명 전사자 1,202명 부상 2,904명이다. 해사를 갓 졸업한 신 소위의 동기생 15명은 해병소위로 임관 후 참전했다가 전사 3명 부상 4명이었다. 한국군의 정찰대 희생도 만만치 않다. 미군이 보기에는 한국군이나 베트콩이나 모습이 엇 비슷해 오인사격의 표적이 됐다. 원거리 정찰때에는 월남인들의 모자 복장을 입었으니 더욱 피해가 컸다. 1968년 당시 병장 봉급이 55불이었는데 이를 비닐 봉지에 꽁꽁 싸서 상의 주머니에 넣고 전투에 임한 용사들을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이 든다. 한국군의 전술기지에는 베트콩들의 시달림에 피해온 양민들이 120만명이나 되었다. 월남전은 이길수 없는 전쟁이었다. 소련 중국의 개입 가능성과 국제 여론을 의식해 북위17도 이북은 공격하지 않는 제한적 전쟁터에서 두더지처럼 산발적으로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베트콩과 언제까지 전쟁을 치룬다는 건가. 정글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어도 폭우 한번 지나가면 다시 정글화 되어 그 밑에서 출몰하는 베트콩들이다. 사이공 시에서 60km 북방에 파놓은 구찌 터널은 현재 유명관광지가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트콩들의 근거지이자 군사기지였지만 미군들은 철수할 때까지도 그 실체를 파악 못했다. 내부에는 식당 무기고 식량창고 영화관 의무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요소요소마다 설치된 구찌터널 입구의 크기는 가로 50cm 세로 80 cm에 풀로 뒤엎어 놓아 위장했기에 찾아내기 어려웠다. 8m 깊이로 총 길이 250km이다. 외부인이 입구 뚜껑을 들어 올리면 그 아래에서 수류탄이 터지거나 부비 트렙이 터지게 설치했다. 요행이 동굴 내부에 뛰어내렸다 해도 낙하지점에는 죽창 끝에 개똥을 발라놓은 목침에 다리가 찔리게 되어 개똥의 독성으로 수많은 미군들이 사망하거나 두려움에 떨었다. 호찌민 시의 전쟁기념관에는 당시의 전투장면 무기 등등이 전시되었는데 한국군의 부대 마크와 군 배치도가 그려져 있다. 2차대전이 끝나자 열강들의 식민지국가들은 독립을 했으나 프랑스가 베트남을 계속 지배하에 두자 베트남은 1946년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48km 길이의 땅굴을 파 전쟁에 대비하며 동굴을 더욱 확장시켰다. (1954년에 남북 베트남으로 분단됨) 미군은 적들의 예상 은거지를 수색하여 격멸하는 정규 전 방식인데 비해 한국군은 6.25 동란 이전부터 게릴라로 잠입하여 아군을 정탐한 북괴군의 유격전술을 수없이 경험해 이를 역이용했다. 주민과 게릴라는 물과 물고기 관계였으니 한국군은 주민과 베트콩을 분리 차단 소탕하는 작전을 폈다. 베트콩이란 월남에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들을 통칭한다. 베트민은 베트남 독립연맹을 뜻하나 쉽게 월맹이라 부른다. 베트콩들의 일부는 폐타이어를 짤라 전투화로 신고 동굴 안에서는 돌멩이 몇 개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연기 안나는 땔감으로 밥을 지으며 퇴각할 때에는 흔적을 지웠다. 베트콩들은 위장술에 능했다. 짜빈동에서 3소대의 급수처는 동네 우물 물 이였는데 불순 주민들이 논 밭에서 일하는척하면서 부대원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몰래 부비트랩을 까는 것을 목도하고 우물가를 빙빙 돌아서 물을 길렀다. 베트콩들은 양민들과 어울려 사니 식별이 어려워 평정과정에서 양민들의 희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총을 들면 베트콩 총을 놓으면 양민인체했다. 대민지원을 마치고 돌아서면 서늘한 베트콩의 총구를 의식해야 했다. 월남전은 전후방이 없는 불리한 여건에서 전쟁을 치렀으니 승리할 리 만무했다.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은 장기전 소모전일 뿐이다. 통킹만 사건 이전부터 월남정부의 부정부패가 날로 극심하여 정부를 불신하는 국민들이 점차 늘어갔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밀어내고 자유 월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전쟁을 감행했다. 월남전 전쟁 중에도 내부에서는 연일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사회가 불안정해져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점차 흐려지면서 패망을 자초했다. 월맹의 집요한 선전 선동이 제 데로 먹혔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월맹의 끄나풀이었다. 월맹은 라오스를 우회하는 호치민 루트를 통해 전쟁 물자와 병력을 투입하고 베트콩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지속적인 전투를 감행했다. 구정연휴 때 휴전합의가 성사된 게 파리 평화회담이다. 합의에 의해 연합군의 철수가 시작됐다. 그러나 얼마 후 월맹군은 월남 전 지역에 대 공세를 펼치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휴전 합의의 공로로 키신저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차 후 상을 반납했다. (반납해도 수상 자 기록에는 남는다) 숨은 내가 쉬고 목숨은 당이 관리하는 게 공산주의라고 나는 정의한다. 4년 전 인가 미 합참의장이 한 말이 생각나는데 <미국을 이기려면 신을 이기고 오라>는 당당한 자신감이었다. 출정에 앞서 파병장병들은 강원도 홍천군 오음리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현재 그 곳은 파병용사들의 만남의 장 기념관이 조성되고 일반인들도 훈련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다. 채명신 사령관의 묘소는 유언에 따라 서울 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 대위는 중령 예편 후 2015년 79세로 영면하였다. 지 소위는 2사단장을 역임하고 1997년 소장으로 전역했고 김세창 중위는 2018년 운명하였다. 당시 그의 철모가 관통 당했으나 안쪽 보호대에 탄환이 걸려 화를 모면했다. 짜빈동 전투 지역에는 월맹 승리를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졌는데 -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분개하여 월맹군이 공격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화염 방사기로 큰 손실을 입혔으며 600이상을 사상시켰다는 내용이다. 한겨레 신문의 고 기자는 전적비를 소개하며 짜빈동 전투는 사실 패배였다는 기사를 올렸다. 월남전 덕분으로 <먼 남쪽 섬의 나라 월남의 달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가 히트 쳤다. 월남이 섬이라고 해도 분위기에 넘어갔다. 안정효의 <하얀전쟁>은 자신이 직접 참전한 전투상황을 소상히 피력했는데 이 소설은 영화로 제작되었다. 나는 이 소설의 내용을 밑천삼아 가끔씩 나도 참전용사라고 너스레를 떨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6.25 전쟁고아 출신이자 백악관 안보 보좌관인 임종덕 대령이 월남전에서 겪은 일화를 소재로 한 디어헌터(The Deer hunter)는 1978년에 히트 쳤다. 그의 15일간의 정글 탈출기는 미 육군사관학교의 교과서에 실렸다. 파병용사들의 위로와 사기진작을 위해 많은 연예인들이 연병장에서 공연할 때에도 포탄이 날라왔다. 월남전 –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졌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은 긴 그림자를 가졌다>며 마침표를 찍었다. 많은 후유증과 내부갈등을 의미 있게 정리했다. 짜빈동 전투에 참여한 용사들 중 유일하게 파 독 광부로 독일 퀄른에서 생활했던 고 장삼곤 님께 이 글을 드린다. 충성! ( 자료 출처 ㅡ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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