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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2018.03.12 01:23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56) - 바람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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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밤의 연가

“알고 보면 참 착한 앤데, 운명의 수레바퀴는 왜 그렇게 늘 쟤 발등만 노리는지 몰라.” 
영미가 라벤더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인상 참 좋은데. 목소리도 꾀꼬리 같고.” 정아가 대꾸했다.     
“그렇지? 전에 같은 룸에서 일했어. 동갑인 데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가서 금방 친해졌지. 문제는 저년의 독특한 남자 취향이야. 만나는 남자마다 늘 뒤끝이 좋지 않았거든. 그도 그럴 것이 사방에 널린 총각들 놔두고 꼭 유부남을 골라 연애를 했으니... 결국 들통이 나고 그때마다 저 찰랑거리는 애먼 머리칼만 수난을 당했지. 매번 일이 터질 때마다 풍경이 아주 살벌했어. 쟤 숙소가 나랑 같은 복도였는데, 부인들이 하나 같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거든. 독하기가 독수리 발톱 같더라.”
“당연하지. 남편 외도에 나는 괜찮아요, 하고 웃어줄 여자가 어디 있겠냐. 다들 눈앞이 캄캄해서 까무러치기 직전일 텐데.”
“근데 이상한 게 있어. 외도를 현장에서 목격한 부인들이 보이는 반응 말이야. 하나같이 자기 남편은 놔두고 상대 여자만 잡도리를 하거든. 모든 책임이 여자에게 있다는 식으로. 마치 자기 남편이 악녀의 꾐에 빠진 피해자인양. 웃기지 않니?”
“그랬어? 그걸 아는 저 친구는 왜 매번 유부남을 골라 연애를 한다니?” 
정아가 혀를 찼다.  
“내 말이. 참 묘한 취향이야. 자기 말로는 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하는데 결과는 늘 똑같았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다 몸을 얹어주었는데 알고 보니 임자가 있더라는 식으로. 하지만 쟤 말을 끝까지 들어보면 결국 유부남들의 풍부한 경제력에 이끌린 측면이 많은 것 같아. 쟤 방에 가보면 온통 명품들과 메이커 제품으로 가득하거든. 트렌치코트며 핸드백, 하다못해 우산에 팬티까지 명품 아닌 것이 없어. 쟤가 그걸 무슨 재주로 샀겠니? 다 경제력 좋은 유부남들 귀에 콧바람 넣어서 받아낸 거지.”
“그건 좀 논리적으로 허점이 있는 주장 같은데. 유부남을 좋아해야 집안에 명품을 채울 수 있다면, 그럼 우리 영미 방에도 루이뷔통이며 구찌 가방이 굴려 다녀야 하잖아.”
당황한 영미가 급히 정아의 입을 손바닥으로 쳤다.
“난 좋아만 하지 사귀는 건 아니잖아!”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에 넌 이미 그 오빠 늪에 두 발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던데.”
“정말 그리 보였어?”
영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이래봬도 눈치가 백단이야, 하고 정아가 입을 샐쭉거렸다. 주춤거리며 망설이던 영미가 정아 귀에다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경철 오빠랑 딱 한 번 잤어.”
“어머, 정말? 너 저번에 마음만 줬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때까지만 해도. 근데 간밤에 함박눈이 어찌나 소복소복 예쁘게 내리던지... 마음이 동하니 몸까지 뜨거워져서 그만... 순전히 내가 꼬리를 쳤어.”  
영미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정아가 영미의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축하해, 하고 소곤거렸다. 영미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더니 눈가에 살짝 물기가 비쳤다. 
영미가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정아도 그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사실 아까부터 정아와 몇 차례 눈이 마주친 아가씨가 있었다.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피부가 희고 콧등이 높았다. 아직 순번을 받지 못한 듯 줄곧 혼자 창가를 서성거리며 테이크아웃 해온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정아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쟤 말이야. 이름이 지연인데 몸매가 예술이야. 여름에 면티에 반바지 입고 시내 한 바퀴 돌고 오면 인근 아스팔트가 다 젖어버릴 정도지. 남자들이 하도 침을 질질 흘리는 통에.” 
영미의 허풍에 정아가 뻥도 원,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쟤도 참 안됐어.” 
“뭐가? 저 친구도 사연이 있는 거야? 하긴 여기 있는 아가씨들이야 다들 딱하지. 나를 포함해서.”
정아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친구는 사정이 달라. 요즘 시중에 쟤 시디가 나돌고 있거든.” 
정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영미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동영상이 담긴 시디 말이야. 쟤 성관계 장면이 들어있는.”
“어머나, 어쩌면 좋아. 얼굴까지 나오는 거야?”
“그건 기본. 나도 봤는데 화질과 음질이 어찌나 선명한지 체모며 비음까지 생생해.”
“본인이 공개한 건 아닐 테고.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야?”
“범인이 누군지는 딱 보면 알아. 비디오에 공동 주연으로 등장하니까.”
“세상에나, 그럼 저 친구가 동의해서 찍은 거란 말이야?” 
“아니, 몰래 찍어서 일본으로 가져가 상품화한 거지.”
“그럼 혹시 여기 우림각 손님이?”
“그렇고말고. 보니까 나도 낯이 익더라. 자주 와서 호시탐탐 노렸던 것 같아.”
정아는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밖에 두고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선입견 때문일까, 옆모습에도 그늘이 가득해 보였다.  
“정말 조심해야겠다.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
“아무렴. 조심하는 게 최고야.”
영미가 장단을 맞추었다. 
“실은 나도 예전에 동영상 찍자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 도쿄에서 온 손님이었는데, 아예 캐리어에 촬영 장비를 챙겨가지고 왔더라. 그 남자는 그래도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를 했지. 자기는 성인용품 제조사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고. 말하자면 자기 회사 제품을 이용해서 비디오를 찍자는 거였는데, 주로 혼자 사는 여자들이 성욕을 해소할 때 쓰는 용품을 가지고 자위행위를 하라고 했지. 출연료 넉넉하게 챙겨주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정아가 다그치듯 물었다. 
“어쩌긴, 난 그런 건 못한다고 단칼에 잘랐지.”
안도의 숨을 내쉰 정아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엉너리를 쳤다.
“정말? 왜, 하지 그랬어. 혼자 신음소리 내며 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영미가 바로 정의 죽지를 갈기며 대꾸했다. 
“다음에 그 손님 오면 내가 너 소개 시켜줄게. 네가 아주 감질나게 연기해봐.”
대기실이 일순 술렁거렸다. 매화실로 점검을 나갔던 장 마담이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열을 지어 앉아있던 아가씨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살폈다. 정아와 영미는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참, 그 얘기 내가 빼먹었다. 지연이 시디 나오고부터 새로운 지침이 내려졌거든. 손님과 침대로 가기 전에는 반드시 조명을 최대한 낮추라는. 몰래 촬영을 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해도 화질을 떨어트려서 화면을 쓸모없게 만들자는 취지지. 잘 기억했다가 실천해.”
영미가 정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정아는 끄덕이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도 눈길을 밖에 두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잔뜩 움츠린 뒷모습이 마치 봄날 비에 젖은 벚나무 같아 안타까웠다. 정아는 다가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라도 해주고 싶어졌다. 시디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정아는 전에 철규 어머니가 가져온 나신 사진에서 느꼈던 공포가 다시금 스멀스멀 떠오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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