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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체
2025.10.03 07:40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 제 10회 장보고한상 어워드대상 수상하다, 바다의 아버지, 원양어업계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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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불고 권영호 회장 제 10회 장보고한상 어워드대상 수상하다, 바다의 아버지, 원양어업계의 산증인 완도 농어민 문화센터에서 장보고 대상에 스페인에 살고있는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에게 시상하였다. 김덕룡 장보고 재단이시장은 축사에서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 돈을 잘 쓰는 것은 예술인데 그 예가 바로 권영호 회장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1966년 국내 최연소 기관장으로 원양어선을 탔다. 그의 첫 승선지는 프랑스였다. 26세 때였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기 힘든 시절, 한국수산개발공사가 프랑스에서 건조한 참치연승어선을 타기 위해 프랑스의 한 조선소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김포공항에서-> 일본, 알아스카, 스위스를 거쳐 파리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야 했다. 그 항해는 길고 외로운 항해였다. 그는 경상북도 울진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다가 나의 천직”이라는 선친의 피는 그에게 이어졌다. 평생 바다와 함께 살아온 그는 바다 색깔만 봐도 어떤 고기떼가 얼마나 지나가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 원양어업이 최고의 호황을 누렸던 1970~1980년대, 대서양 어업은 라스팔마스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는 선원에서 1971년 대림수산 기지 주재원으로 라스팔마스에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기업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우리나라 원양어업 선구자, 대서양의 장보고, 선박왕 오나시스로 고기의 아버지로 어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기까지 그는 휴가 한번 가본적이 없고 잠을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원양업계의 산증인이다. 당시 우리 기술력이 미천한 시기, 회사의 배려로 선박에 설치되어있는 각종기기 연수를 하면서 열악한 기술력에 앞장 섰던 원양어업의 개척자로서 자부를 느낀다고 했다. 그의 애향심은 남다르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묻자 “바다에서 번 돈을 들고 와서 조국에 투자할 때,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할 때”라고 답했다. 그는 1986년 동영장학재단을 만들어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국내 사업이 어려움에 직면한 지금에도 2025년 지방출신 대학생 등 100여명에게 1억원을 지원했다. 장학 사업은 2025년 기준 39년째가 된다. 수혜자 지원규모가 국내외 1만9천4백명이며, 금액으로는 180억에 달한다고 했다. 2008년엔 계명대에 임야 243만4500㎡(73만6000평 당시250억)를 기증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 산업화에 따라 지방도시 국제화에 동참하여 여러 곳에 관광업을 발판으로 국제도시화에 기여한바 크다고 자부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1995년부터 조선족 선원을 채용하고 조선족 중고등학교에 항해, 기관과를 설립하여 5회 졸업생을 내고 선장, 기관장을 양성했다. 선원들의 고향마을에 자선 병원을 설립하고, 양로원 등지에 1만 여대의 TV를 기증, 조선족 학교에 교육 기자재를 지원하고, 농촌 농로를 내어주고, 길림성 길림대학에 단과대학을 설립했다. 또한 대학 내에 식품공장을 만들어 그 수익금은 전액 장학금에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 마요르카에 있는 우리나라 애국가를 작곡한 고 안익태 선생(1906~1965)의 유택을 사서 정부에 기증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가족과 자신에게는 자린고비다. “쓸 것 다 쓰고 어떻게 남을 도울수 있는가” 평생 그의 지론이다. 그의 아들은 난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한다. 수상소감에서도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 가정 안전한 투자라고 했다. 외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조국의 사업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내 조국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정신적으로 극복했지만, 현업에서 물려나야 하는 시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우리 모두 권영호회장의 장보고 대상을 축하하는 이유이다.(자료제공: 김학순 유럽총연합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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